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16:35:34

천주교 전주교구/성지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천주교 전주교구

1. 개요2. 목록
2.1. 치명자산 성지2.2. 전동성당2.3. 숲정이 성지2.4. 초남이 성지2.5. 천호성지2.6. 여산성지2.7. 나바위 성지2.8. 서천교 성지2.9. 초록바위 성지2.10. 전주옥 성지2.11. 김제 순교성지2.12. 개갑 장터 성지2.13. 김난식 방지거, 김현채 토마스 묘소2.14. 신시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 체류지
3.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천주교 전주교구가 관리하는 천주교 성지 문서.

2. 목록

2.1. 치명자산 성지

"유항검의 가족 7분이 묻힌 곳"

치명자산에는 신유박해(1801)때 순교한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가족 6명이 합장되어 있다. 이 중에는 다블뤼[1] 주교가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칭송한 동정부부 순교자 이순이와 유중철도 포함되어 있다.

유항검 가족은 처음에 초남이 근처 바우배기에 매장 되었다가 1914년 전주성당(현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가 유해를 모셔와 현재 자리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가 해발 300여 m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순교자들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을 높이 기리고, 순교자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이후 1993년 유항검의 유해 확인을 위한 시굴 작업을 진행하여 유항검과 그 가족 6명 모두의 유해를 확인한 후 재안장했다. 순교자 묘 밑에는 1994년 건립된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직자 묘지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순교자 묘는 도지정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2.2. 전동성당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성지"

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는 신해박해(1791)때,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곳이고, 또 ‘호남의 사도’로 불렸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였다. 1889년 전주본당이 설립되고 보두네 신부가 부임했지만, 당시 전주에는 신자가 1명도 없어 처음에는 완주 소양 대승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며,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다. 보두네 신부를 통해 이곳에 성당이 건립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보두네 신부 자신도 이곳이 순교터인 줄은 몰랐지만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있을 법한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주춧돌을 세웠는데, 바로 그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다.

전동성당로마네스크 양식으로써 사적 제 288호이고 사제관은 도지정 문화재 자료 178호이다.

2.3. 숲정이 성지

"순교자들의 피의 꽃으로 피어난 곳"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어 숲정이로 불렸던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었다. 이 근처에는 피 묻은 칼을 씻을 수 있는 전주천이 있었기에 사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기해박해(1839) 때는 12년간 전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5명(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과 많은 신자(홍재영, 최조이,이조이, 오종례 등)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1866) 때는 6명(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조화서, 정원지)이, 1867년에도 많은 신자들(김사집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숲정이 순교터는 후에 이명서 성인의 후손이 매입해 순교자비를 세웠다. 숲정이 순교터는 도지정 기념물 제71호이다.

2.4. 초남이 성지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생가터"

초남이 성지는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생가터이다.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내려와 가족들과 가솔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김제, 금구, 고창, 영광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다. 또한 진산 사건의 핵심인물인 윤지충과는 이종사촌 사이. 유항검은 윤지충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연구했다고 한다.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신부로도 활동했지만, 가성직제의 부당함을 알고 난 후에는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만 둘 것을 요청했다. 그 후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함께했다. 1795년에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이곳에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고 유항검과 교회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했다.

유항검은 신유박해(1801) 때 체포되었고 ‘대박청래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되어 대역무도죄를 선고받아 그해 9월 17일 풍남문 밖(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순교하거나 유배되었고 그의 집은 파가저택 되었다. 또 이곳은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부부의 삶을 4년 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살던 유항검의 가족들 중 7명이 신유박해 때 순교했는데, 이들의 시신은 처음에 바우배기에 모셨다가 1914년에 치명자산으로 이장했다.

최근에는 바우배기 성역화 과정 중 천주교에서 복자로 공경하는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유해가 나왔으며 초남이 성지 인근에 세 순교복자의 유해를 봉안하였다.

2.5. 천호성지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

천호성지는 병인박해(1866)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6명의 성인 중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4명과 그해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등이 묻혀있고, 또 2년 뒤 여산에서 순교한 10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나 아직도 종적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천호산 자락에 묻혀있다.

천호는 기해박해(1839) 이후로 박해를 피해와 숨어살던 신자들이 이룬 유서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성지 인근에는 1845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된 후 페레올[2]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숨어서 미사를 드리던 미사굴과 1867년 블랑[3] 신부가 처음으로 정주하여 사목한 전라도 최초의 사목지 어름골이 있다. 또한 이웃사랑을 실천한 박준복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낙수골이 있다. 천호성지에는 피정의 집과 세상을 떠난 영혼을 모신 봉안경당, 그리고 성물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2.6. 여산성지

"순교자들의 피의 꽃으로 피어난 곳"

여산은 작은 고을이지만 왕비[4]를 배출한 지역이어서 특별히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다.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도 이뤄졌는데, 특히 1868년에는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이곳 순교자들은 여산, 고산, 진산, 금산 등지에서 잡혀와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배다리 근처에서는 교수형으로, 여산 숲정이에서는 참수형이 주로 집행되었고, 동헌 앞마당에서는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얼굴에 물을 뿌린 후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켜 죽게하는 백지사형이 집행되었다.

여산옥터는 옥에 갇힌 신자들의 고통과 신앙을 묵상할 수 있는 곳이다. 여산의 순교자들은 옥에서 한마음으로 서로 격려하며 기도했던 공동체로 유명하다.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통 중에 있던 신자들은 옷 속에 있는 솜을 먹기도 하고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을 뜯어 먹기 바빴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곳 순교자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성첨이며, 이들의 유해는 천호성지와 천호산 일대에 묻혀 있다.

2.7. 나바위 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최초 기착지"

나바위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금강으로 들어와 입국한 곳이다.

1845년 10월 12일 밤 김대건 신부 일행은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7년이었고, 초대 주임은 베르모렐 신부였다.

베르모렐 신부가 성당을 세울 때는 김대건 신부 일행을 기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김대건 신부의 착지(着地)로 알려져 이곳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나바위성당의 건축 양식은 처음엔 한옥 형태를 취했다가 1916~1917년에 흙벽은 서양식 벽돌로 하고,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 벽돌을 붙여 종탑을 세웠고,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특이함으로 국가지정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2.8. 서천교 성지

"성 조윤호 요셉의 순교터"

서천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윤호 성인의 순교터이다. 조윤호는 조화서 성인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로, 부친 조화서와 함께 완주 소양 성지동에 살다가 함께 잡혀와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 뒤에 서천교에서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는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자(父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 지 10일 뒤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모진 매를 맞았지만, 죽지 않아 끝내는 밧줄로 목을 졸라 사형시켰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2.9. 초록바위 성지

"남명희와 홍봉주의 아들이 수장당한 순교터"

초록바위는 병인박해(1866)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큰아들 남명희와, 남종삼과 함께 순교한 홍봉주의 아들을 교수형으로 죽인 후 전주천으로 밀어넣어 수장시킨 곳이다.

남종삼이 처형되고 난 후 그의 부친 남상교와 큰아들 남명희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14세였던 남명희는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남명희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까지 처형을 연기하고 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후 이듬해에 이곳 전주천 옆의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으로 죽인 다음 그 시신을 전주천에 수장시켰다. 남명희 집안은 3대가 순교의 영광을 입었다.

2.10. 전주옥 성지

"심문과 형벌의 장소이자 기도하던 곳"

전주옥은 신유박해(1801) 때 동정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그해 10월 9일 옥중 교살된 곳이다.

정해박해(1827)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했다.

기해박해(1839) 때는 김조이,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박해시기에 옥은 고통스런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기도처였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는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는 정해박해(1827) 때 잡혀와 만 12년간을 옥중에서 긴긴 세월을 보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 놓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한때 이 옥에는 240여 명의 교우들이 갇혀 있었다고 한다.

2.11. 김제 순교성지

"복자 한정흠의 순교지"

김제동헌은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자녀의 스승이었던 순교자 한정흠이 감금되었던 곳이다. 한정흠은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출신으로 1784년 9월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해에 이승훈 베드로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그해 3월 박해의 불길이 전주까지 번져 유항검이 체포되자 한정흠 또한 체포되어 전라감영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혹독한 형벌과 회유책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후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지만, 그의 뜻은 더욱 굳어져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신앙을 선택했다. 형조에서는 8월 21일 한정흠을 김제로 보내어 처형토록 했다. 고향에서 처형하여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정흠은 김제로 이송되어 옥에 갇혀 있다가, 전시효과를 최대로 높일 수 있는 장터에서 1801년 8월 26일 45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 한정흠의 순교비는 김제 요촌성당에 있으며, 순교터는 요촌제1공영주차장 내(김제 코러스마트 뒤)에 자리잡고 있다.

2.12. 개갑 장터 성지

"복자 최여겸의 순교지"

무장현 공음치면(현 공음면 석교리)의 개갑 장터는 유명한 우시장이었다. 이곳에서 순교한 최여겸은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윤지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이후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든 후 이존창을 통해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와 무장, 흥덕, 고창, 영광, 함평 등 서남 해안 지역을 대상으로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가 복음을 전해 세례를 받은 사람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도 28명이나 되었다.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자 처가인 한산으로 피신하였지만 거기에서 체포되어 무장과 전주 감영으로 차례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과 김천애를 만나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였다.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했다.
이에 따라 최여겸은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며칠 후 개갑 장터에서 8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나이는 39세였다.

이곳은 고창군 지정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2.13. 김난식 방지거, 김현채 토마스 묘소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산 215
- 감수 중-

2.14. 신시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 체류지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 산4-1
- 감수 중-

3. 관련 문서



[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3대 교구장[3]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7대 교구장[4] 정순왕후 송씨. 조선 단종의 왕비. 여산 송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