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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3 17:37:19

인도 왕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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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줄거리3. 평가4. 번안 소설 '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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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쥘 베른의 소설. 1879년 작품. 원제는 Les Cinq Cents Millions de la Bégum으로 '인도 왕비로부터의 5억'이라고 금액까지 정확히 명시되어 있다.
위키 문헌 링크(프랑스어)

2. 줄거리

제목만 보면 인도 왕비의 유산을 노리고 악당과 한 판 대결을 벌이는 모험 소설일 듯 하지만 처음부터 유산을 상속받는 내용이라 제목은 그냥 맥거핀에 가깝다.

인도의 왕비(라자 부인)의 5억 프랑에 달하는 막대한 유산이 그 친척인 두 과학자에게 상속되는데, 한 명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사라쟁(François Sarrasin) 박사이며 다른 한 명은 독일의 슐츠(Schultze) 교수이다. 두 과학자는 유산을 활용하여 각자의 이상에 따라 '도시'를 만들게 된다. 참고로 도시를 만드는 곳은 미국오리건 주.(응?)

사라쟁 박사가 건설한 '프랑스빌(Franceville;프랑스 마을)는 인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환경과 복지를 존중하는 유토피아로서 설계된다. 슐츠 교수의 '슈탈슈타트(Stahlstadt;강철 도시)는 정복과 권력의 이념에 따라서 군수 공업을 중심으로 건설하며, 가공할 병기를 만들어서 세계 각국에 판매하며 발전하게 된다.

사라쟁 박사가 자신의 유산을 빼앗아갔다는 망집에 사로잡힌 슐츠는 프랑스빌을 파괴할 비밀 무기를 만든다. 사라쟁의 아들 옥타브의 친구이자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는 알자스 출신 열혈 청년 마르셀 브뤼크망이 슈탈슈타트에 잠입하여 비밀 무기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슐츠는 거대한 대포를 만들고 이산화 탄소드라이아이스화하여 포탄에 탑재, 프랑스빌을 일격에 파괴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포의 위력이 너무 강한 나머지 포탄은 그대로 지구 탈출 속도를 얻고 위성 궤도로 돌입하여 프랑스빌에 떨어지지 않았고, 슐츠 본인은 신형 포탄의 실험 도중 드라이아이스 유출 사고로 온 몸이 얼어붙어버려 슐츠의 음모는 그의 어처구니없는 자멸로 영원히 실현되지 않게 되었다.

3. 평가

전반적으로 평은 썩 좋지 않은 소설이다. 먼저 제목의 유래가 된 5억 프랑이 웬 인도 왕비로부터 덜컥 프랑스, 독일의 두 박사에게 상속됐다는 것부터 좀 황당하다. 그렇게 있기 어려운 일이 생겼는데도 작품 초반을 제외하면 인도 왕비에 대한 언급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말 그대로 "도시 만들기" 스토리를 짜기 위한 작위적인 배경 설정이다. 또한 가상 사회를 그린 SF로 보기에도 프랑스빌과 슈탈슈타트의 묘사가 너무 적어서 해저 2만리노틸러스 호처럼 매력을 느끼기도 어렵다.

프랑스 국뽕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프랑스의 이상을 찬양하면서도 프랑스빌은 이상 도시라면서 황인종의 출입이 금지된다는 인종차별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건설 과정에서 중국인 쿨리를 대거 동원했지만, 이들은 '평생 프랑스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을 해야 품삯을 받을 수 있었다.

자기 땅에서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도시를 만들어서 전쟁을 일으키는 데도 미국의 묘사가 없는 것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1879년이면 오리건이 미국 땅이 된 지(1859년) 얼마 안 된 시기이긴 하지만. 애초에 미국을 배경으로 설정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작중에서도 알자스 출신인 마르셀에게서 잘 드러나지만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충격을 정신승리하기 위해서인지 독일을 지나치게 비난하는 감이 있다. 보불전쟁 이전 시점에 쓰여진 지구 속 여행과 비교해 보면 확실한데, 지구 속 여행의 독일인 교수인 리덴브로크는 우스꽝스럽지만 매력있는 인물로 묘사된 반면, 슐츠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으로 묘사된다. 두 인물 묘사에 모두 '전형적인 독일인'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긴 하다. 다만 '프랑스빌을 부수는 데에 이유는 없다. 우리의 생존 경쟁일 뿐'이라든가, '지도자만이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등 슐츠의 미친 행적은 실제로 나치 독일이 보여주었던 모습이라는 점에서 아주 틀린 묘사는 아니게 되었다.

슐츠가 발사한 대포도 결국에 인공위성이 됐다는 점에서 현실을 예견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1]

4. 번안 소설 '철세계'

한창 근대 동양에서 유럽 소설을 번안해서 출판하던 때에 나온 소설이라 이 소설 역시 번안이 되었다. 작품이 출간된 지 8년 후인 1887년 모리타 시켄(森田 思軒)이 '프랑스 · 독일 두 박사 이야기(仏 · 曼二学士の譚)'[2][3]라고 번안했다. 이후 이 제목은 '철세계(鐵世界)'라는 변경됐다. 번안이라고는 해도 당대 일본인이 모를 만한 내용을 빼고 서술을 좀 바꾼 것뿐으로, 많은 부분이 바뀐 것은 아니다. 이후 중국에서도 1903년 포천소(包天笑)가 같은 제목으로 번안하였다.

당대 조선에는 이해조가 1908년 번역하였는데 중역의 폐해로 고유명사가 원래와는 전혀 달라져있다. '프랑스'를 '법국'으로 적은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어판을 거친 번역이다(일본에서는 '불국(佛國)'이라고 했다). 고유명사 표기는 일본에서의 한자 음역을 그대로 가져왔으니 중국어판도 일본어판을 중역한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프랑스어판(원본)→일본판→중국판을 거친 삼중역이다(...) 그러나 번역을 한 게 무색하게도 일제강점기에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중국판 역시 대체로 일본판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부분이 달라서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다. 이를테면 '위생회의'라는 말에 'ᄉᆞ람이, 엇지ᄒᆞ면, 죽지안는, 술법을엇을고(사람이 어찌하면 죽지 않는 술법을 얻을꼬, 人何以得不死之術)'라는 친절한(?) 설명이 달려 있다든가. 조선판은 중국어판과 거의 비슷하다. 갑자기 대사로 시작하는 원작/일본판과는 달리 '석양이 붉고 삼림이 울창하여~' 등의 배경 소개부터 들어가는 조선/중국판은 동양 옛 소설 문체의 전통을 좀 더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중일 3국에서 쓰게 된 '철세계'라는 제목은 프랑스빌보다는 슈탈슈타트를 좀 더 의식한 제목이라는 점에서 당대 동양에서 지향하던 근대의 방향이 슈탈슈타트에 더 가깝다는 것을 눈여겨볼 수 있다. 하기야 그 때 동양에서는 프랑스빌의 위생이니 건강이니 하는 가치는 부차적인 목표일 뿐이었으니... 슈탈슈타트처럼 국가가 나서서 강철과 대포를 만들어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것이 근대화의 최우선 과제로 여겨지던 때였다.

조선에서는 철세계가 번역된 같은 해인 1908년 혈의 누로 유명한 이인직은세계(銀世界)라는 소설을 썼었는데 이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쪽은 지역 설화를 바탕으로 한 창작 소설. 금세계나 동세계는 없다

재미있게도 위 세 번안판에서는 사라쟁 박사의 아들 옥타브가 나오지 않는다. 분명 원작에서는 사라쟁 박사가 아들 옥타브 사라쟁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를 친구 마르셍한테 알려주지만, 번안판에서는 모두 사라쟁 박사가 마르셍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다. 아마 작중에서 옥타브가 하는 일이 그다지 없다 보니 그냥 쳐낸 모양. 또한 원작에서는 사라쟁 박사의 딸 잔 사라쟁을 마르셍이 좋아한다고 나오는데 이 역시 분량이 미비해서 삭제되었다. '잔을 위해서' 같은 부분은 모두 '사라쟁 박사를 위해서' 식으로 바뀌었다.

또 한 가지 특징으로는 처음에 왕비한테서 물려받은 돈이 원래는 5억 프랑인데, 이들 번안판에서는 하나같이 1억 5백만 원으로 나온다. 1억 5천도 아니고 1억 5이라니 묘하게 애매한 금액이다(...). 그런데다 중국/조선에서 그대로 이 수치를 돌려써서 화폐 단위가 무슨 원인지 아리송해져버렸다. 아마 일본에서 제일 먼저 번역했으니 당대 일본 엔에 환율을 맞춰서 계산한 게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어쩌면 당대에는 '억 = 100,000,000'의 공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다.

두 번안판에서 고유명사들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판 철세계는 위키문헌에 텍스트로 올라와 있어서 접근이 편리하다.(#) 다만 20세기 초의 한국어로 쓰여 있는지라 옛한글이 많고 그냥 읽기에는 조금 까다롭다.

일본판 철세계는 영인본을 웹에서 볼 수 있다.(#) 중국판은 둘에 비해서 접근성이 좀 안 좋은 편인데, 여기에서 일부를 볼 수 있다.

[1] 실제 역사에서는 1918년 파리 대포가 세계 최초로 성층권에 진입한다. 실제로 최초의 인공위성은 1957년으로 소련이 쏘아올린 스푸트니크이다.[2] 仏은 프랑스를 뜻하는 불란서(仏蘭西), 曼은 독일을 뜻하는 일이만(日耳曼;게르만)에서 따온 것이다.[3] 学士는 '학사'이긴 한데, 작중의 사라쟁은 docteur로 박사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학-석-박을 따진 번역이라기보단 그냥 적당히 많이 공부한 사람이란 뜻에서 학사라고 번역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