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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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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원3. 개발4. 성능5. 한계점6. 실전7. 효용성8. 해체와 은폐9. 후속10.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파일:external/www.militaryfactory.com/paris-gun-artillery-wagon.jpg
포구 부앙각도 시험을 위해 포신을 올리는 파리 대포

Paris-Geschütz / Pariser Kanone[1]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제국이 만든 열차포. 당시 파리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한 무기였다.

2. 제원

구분 상세
정식명칭 Lange 21-cm-Kanone in 38-cm-Schießgerüst „Paris-Geschütz“
(38cm 포좌에 장착된 21cm 장포신 평사포, 파리 대포)
제작사 크루프
설계자 프리츠 라우젠베르거(Fritz Rausenberger)
운용국가 독일 제국
형식 열차포
중량 256t
전장 34m
전체포신길이 37m
강선포신길이 21m
구경 초기 211mm
중기 224mm
후기 238mm
부앙각도 0도 ~ +55도
폐쇄기 수평 슬라이드 블록 방식
포탄중량 106kg
내부작약 TNT 7kg
포탄길이 960mm
장약중량 196kg
포구초속 1,640m/s
최대사정거리 130km
최대도달고도 42.3km
포탄비행시간 182초
연사속도 15분당 1발, 1일 사격 한계 20발
포신수명 65발
교체후 제조사로 후송해서 강선 재가공 및 구경 확대
생산수량 7문
운용인원 독일 제국 해군 수병 80명

3. 개발

1차대전 초반에 슐리펜 계획이 실패하고 참호전이 전개되자 전선의 참호를 지탱해주는 전선 근방의 도시를 직접 공격할 필요성이 나타났으며 특히 최전선에서는 약간 떨어졌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인 프랑스 제3공화국의 수도 파리를 직접 공격해야 할 필요성이 나타났다. 전쟁 초기에는 항공기나 비행선의 공습을 시행했으나 점점 협상국의 항공력이 증대하면서 독일 제국군의 공군력으로는 더 이상 공격이 힘들고 격추를 많이 당하는 등 피해가 커지자 초장거리를 사격할 화포가 필요해진 것이다.

파리 대포를 만든 독일의 철강 재벌 크루프 사는 19세기부터 대포에서 잠수함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기를 만든 회사였다. 사실 파리 대포는 처음부터 이런 사정거리를 노리고 개발한 것은 아니었고 우연한 실수와 그로 인한 발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916년에 파리 대포의 개발이 시작된 후 제작된 포를 테스트하던 중 실수로 고각으로 발사해버렸는데 각도상 사격장 내부의 목표 근처에 떨어졌어야 할 포탄이 훨씬 먼 거리까지 날아가서 착탄한 것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니 공기 저항이 적은 성층권을 통과하여 사거리가 늘어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원래 포물선 운동을 하는 물체는 체공시간이 길어지면 공기저항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에 공기저항이 없을 때 이상적인 최대사거리를 기대할 수 있는 +45도보다 다소 낮은 각도인 +42도나 +43도로 발사해야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성층권에 도달할 정도로 포탄이 비행하는 고도가 높아질 경우에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밀도가 낮아져 공기 저항의 영향이 줄어들어서, 파리 대포의 경우 오히려 +45도보다 높은 각도로 쏘는 것이 사거리가 늘어났다. 대략 +50도 ~ +55도 정도에서 최대 사거리가 나온다. 중력가속도도 고도가 높아질수록 약해지므로 고려 요인 중 하나이나 그 영향은 미미한 편. 이러한 이유로 각종 고전역학, 공업수학, 수리물리학 교재에 예제로 등장할 정도다.

이후 이 연구를 바탕으로 바이에른급 전함의 주포인 38cm 45구경장 SK L/45를 이미 육상에서도 해안포공성포로 개조해서 사용중이라는 것을 파악한 후 해당 화포의 포신 내부에 21cm 구경의 포신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포신을 튼튼하게 만들면서 포신을 길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38cm 포신의 포구를 넘어가는 부분은 포신 보강용 파이프를 21cm 포신 외부에 장착한 후 볼트로 고정하는 방식으로 보강했다.

그리고 포구초속을 목표인 1,500m/s로 올리려면 포신의 길이가 최소 24m 이상이 필요한데 당시 크루프사가 보유한 장비로는 강선을 깎을 수 있는 포신 길이의 한계가 18m에 불과하므로 포구에 추가로 6m 길이의 활강포 포신을 장착했다. 궁여지책이긴 했으나 당시의 일반적인 강선포에서 포신 내부의 강선 부위를 빠져나온 포탄이 약간 흔들리는 증상을 포구쪽의 활강포 포신이 억제해주는 효과를 얻었다. 그리고 포미쪽은 원래 38cm 함포의 포미가 튼튼하여 특별하게 개조나 보강을 할 필요는 없었다.

포신이 너무 길기 때문에 포신 자체의 중량으로 인해 포구가 처지는 증상이 발생하므로 포신 상부에 강철 케이블을 연결하고 포신이 시작되는 지점 근처에 철제 지지대를 달아서 크레인처럼 포구처짐을 방지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사격 준비나 재장전시 특수한 망원경으로 포구 부위를 관측한 후 포구의 처짐이나 뒤틀어짐을 발견하면 포신 연장 부위의 볼트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포구를 다시 정렬시켰다.

열차포지만 워낙 크고 무거워서 특수용 전용 열차에 탑재된 상태에서도 발포는 불가능했고 미리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포대까지 열차로 운반한 후에 토목공사급 과정을 거쳐서 파리 대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야 했다. 포대는 자체적으로 360도 회전이 가능해서 일단 파리 대포가 설치된 후에는 포구를 돌릴 수 있었다. 해당 방식은 미리 튼튼한 포대를 만들어놓아야 하기에 후대의 구스타프 열차포는 전용 특수열차를 사용하는 것은 같으나 철도를 원형으로 부설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철근 콘크리트제 포대를 미리 설치하는 번거로움은 피했다.

마지막으로 독일 제국 해군함포를 유용했기 때문에 파리 대포는 독일 제국 해군의 수병들로 구성된 80명이 운용했으며 독일 해군성 군수부 사령관인 막시밀리안 로게(Maximilian Rogge) 중장이 지휘했다.

4. 성능

역전다방에서 소개하는 파리 대포 동영상

파리 대포는 엄청난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1차대전 당시의 협상국의 화포는 함포까지 동원해도 40km 수준의 사정거리만 가지며 현대의 장사정포도 일반탄을 일반 장약만 넣고 사격하면 15km - 20km의 사정거리만 가능하고, 장포신을 채용하고 약실을 강화해서 추진장약을 많이 넣고 포탄도 로켓보조탄베이스 블리드를 동시에 장착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40km - 70km 정도의 사거리를 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가벼운 포탄을 공기 저항이 적은 성층권을 경유해 쏘아 보내기 때문이다.

포탄은 마하 5의 속도로 발사돼 고도 40km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 높이는 나치 독일이 V2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때까지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높이였다. 물론 이 기록이 포로 도달한 최고 고도는 아니어서, 포로 도달한 최고 고도 기록은 제랄드 불이 계획한 HARP 포로 고도 180km 근처까지 도달한 기록이다.

그리고 1차대전 당시에는 날아오는 포탄을 요격할 수단이 없었으며 대포병 사격 기술도 아직은 초창기라서 목표를 찾아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다가 독일 제국군도 파리 대포 주변에 가짜 포병 진지를 깔아놓은 후 근처에 일반적인 포병을 배치해놓았다. 그리고 파리 대포를 사격할 때 근처의 일반 포병도 동시에 사격하는 방식으로 필사적으로 파리 대포의 위치를 감추는데 노력했다. 포격도 낮 시간에만 실시했는데 야간 사격시 포구 섬광으로 인해 위치를 들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협상국이 열차포까지 동원해서 대포병 사격을 하고 폭격까지 퍼부었으나 파리 대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잘 해봐야 운용요원 중에서 일부 인원이 부상당하는 수준의 약소한 피해만 주었다.

포탄의 신뢰성도 매우 높아서 불발탄이 발생하지 않았고 포탄 자체가 고압력과 고열을 견디기 위해서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철갑탄의 효과도 발휘하므로 건물에 명중하면 벽체를 관통하고 내부에서 폭발하면서 거대한 파편이 기둥을 손상시키는 등의 사태를 일으켜서 건물을 붕괴시키는 2차 피해를 발생시켰다.

따라서 파리 대포는 1차대전 시기에 등장한 비대칭 전력의 시초라고 볼 정도다. 위력이 약하고 명중률이 낮았으나 당시 협상국이 파리 대포에 대응할 수단이 없다시피했다는 점에서 비대칭 전력에 들어간다.

5. 한계점

파리 대포는 운용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위에 언급했듯이 열차포지만 사실상 열차로는 수송만 하고 실제로는 고정 진지에서 운용하는 공성포라서 운용 자체의 번거로움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더해서 초장거리 사격을 위해 약실에서 대량의 장약을 사용해서 포탄을 장포신으로 발사하는 것에 따른 어려움도 추가되었다.

일단 장약을 200kg 가까울 정도로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장약 발화시 2,000℃에 도달하는 초고온이 발생하므로 장약이 탑재된 황동으로 된 약협이 배출되지 못하고 약실 내부에서 녹아버리며 포탄 외부에 장착된 강선 맞물림용 구리 링도 녹아버리므로 강철제 포탄 측면에 직접 강선과 맞물리는 구조를 추가해놓아야 했다.

여기에 더해서 약실에서 발생하는 가스 압력은 최대 4,800bar(기압)까지 올라가므로 앞서 언급한 강철제 포탄이 말 그대로 포신 내부와 강선을 사격시마다 갈아버리는 수준으로 마모현상이 심했다. 대략적으로 포탄 3 - 4발을 발사하면 포신 내부가 1mm씩 깎여나간다는 가공할 수준의 포신 소모를 보였다.

그래서 처음 쏘는 포탄은 구경이 216mm로 시작하고 포신 마모를 자주 측정해서 순번대로 조금씩 구경이 커지는 포탄을 순서대로 쏘다가 65발을 발사한 후에는 포신을 제조사인 크루프사에 후송해서 새로 강선을 파면서 구경을 더 늘렸다. 파리 대포의 구경이 초기 211mm, 중기 224mm, 후기 238mm으로 나누어진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구경이 늘어난 포신은 부피가 늘어나고 발사시 가스 압력이 감소하기 때문에 사정거리가 감소하여 파리에 더 가까운 2번 포대(보몽앙벤)과 3번 포대(브뤼에르쉬르페르)에서만 사용이 가능햇다.

포탄도 중량에 비해 파괴력이 약한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서 21cm 구경치고는 가벼운 포탄인 106kg 수준의 포탄을 선택한데다가 포탄이 포신 내부의 초고압과 초고온에 깨져나가거나 유폭하지 않도록 포탄 구조 및 본체와 내부 격벽까지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내부작약이 TNT 7kg 수준으로 매우 적었다. 그래서 포탄 중량의 약 6.6% 수준으로 내부 작약이 적은데다가 포탄 자체가 너무 튼튼한 나머지 내부 작약이 폭발하더라도 파편이 많이 발생하지 않고 발생한 파편도 너무 큰 관계로 인해 파괴력이 추가로 약화되었다. 실제로 포탄이 명중한 곳에 발생한 화구는 너비가 3 - 4m에 깊이가 1m 수준으로 작은 편이었다.

그리고 초장거리를 사격하고 목표가 전선 후방 깊숙한 곳이므로 탄착관측이 불가능에 가깝다. 현대처럼 GPS로 유도되는 M982 엑스칼리버같은 유도포탄이 있던 시절이 아니므로 파리 대포로 명중가능한 목표는 매우 커야 했다. 파리 대포의 목표로 파리라는 대도시 겸 넓은 지역을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공장이나 항구, 비행장 같은 작은 목표는 노리기조차 포기했다. 파리 시내를 포격할 때도 탄착관측은 프랑스 신문에 나온 기사나 간첩을 활용하는 식의 간접적이고 부정확한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파리 대포의 사정거리와 포탄도달고도가 너무 커서 포탄이 날아가면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도 영향을 받아서 조준할 때 코리올리 효과를 계산에 넣었지만 오차가 추가로 발생했다고 한다. 실제로 독일 국내에서 시험사격을 할 때 초탄이 계산보다 393m 짧게 명중하고 1,343m의 좌우오차까지 발생했으므로 그제서야 코리올리 효과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을 파악할 정도였다. 현대 포병이 사격할 때에도 코리올리 효과를 계산하지만 1차대전 당시에 비해서 매우 정밀하게 계산하는데다가 포탄이 성층권까지 도달하지도 않으므로 정밀한 명중이 가능하지만 파리 대포는 성층권에 도달하고 다시 대류권으로 재진입하면서 추가로 탄도에 흔들림이 발생하므로 파리 시내에 명중한 파리 대포의 탄착군을 보면 엄청나게 흩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파리 대포는 실질적인 파괴력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초장거리가 아니라면 명중률을 높일 수는 있지만 사정거리를 위해서 다른 많은 요소를 희생한 화기이기 때문에 장거리 수준에서 사용하더라도 포탄의 위력은 약한데 연사속도도 느리고 운용하기 까다로운 계륵이 된다.

6. 실전

1918년 3월 23일 토요일 7시 20분 파리의 센 강변 한 가운데에 포탄이 떨어졌다. 처음 포격 소리를 들은 프랑스 육군 장병들은 독일 제국군 육군 포병의 77㎜ 구경 야포탄이라 생각했고 시민들은 독일 육군 항공대의 23파운드 항공폭탄이라 여겼다. 조사 결과 파편 조각을 통해서 그것이 포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포탄이 어디서 발사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대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독일 육군의 항공기가 지나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며칠 전에 수류탄 공장에서 오폭사건이 있었기에 그 영향으로 봤다는 기록이 있다. 포격 초반 프랑스 육군 항공 장교들이 대공 경계 근무자들을 급히 호출하여 조사한 결과 비행기라고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하여튼 포격을 개시한 23일 당일의 물리적인 전과는 25발의 포탄과 16명의 사망자 21명의 부상자와 7개의 가옥 그리고 파리 시내를 7시간동안 마비시키는 의외로 낮은 피해를 입혔지만 원래부터 독일이 노리던 상징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의미는 충분히 달성하였다. 공포에 빠진 파리 시민들은 의외로 빠르게도 다음날 4시쯤 군의 발표에서 그 포탄이 독일에서 개발한 신형 대포의 포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월이 지나 4월이 되자 프랑스 육군의 레인저들도 이 파리 대포의 위치를 어느 정도 추정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주도면밀하게 파리 대포 주변에 적당한 다른 대포들도 같이 설치하여 그저 그런 일반적인 야포의 방렬 대형으로 보이게 하거나 위장포를 씌워 공중 정찰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열차포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계속해서 이동시켰기 때문에 포격이 계속되던 8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군은 파리 대포를 찾아내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지막 공세에서 실제로 파리 대포를 발견하여 공격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파리 대포가 곧바로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눈앞에서 놓치고 만다.

3월부터 8월까지 무려 320 - 367발(기록마다 차이가 있다)의 포탄이 날아와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사망 250여 명, 부상 62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중에는 금요일 랭스의 랭스 노트르담 성당에 인파가 모였을 때 포탄이 성당 기둥에 직격하여 무려 88명을 일격에 사살한 기록도 남아있다.[2]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무려 1만이 넘는 인구가 빠져나갔고 같은 시기 파리 남부의 오를레앙은 인구가 두배로 늘었다. 파리 시민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차나 마차를 거부하고 철도와 버스를 고집했다고 한다. 또한 파리 대포의 공격이 시작된 3월 말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대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의 장례식도 대폭 축소된 채 거행되었다.

7. 효용성

떨어지는 명중율과 한 발당 위력, 높은 운용 비용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파리 대포를 운용한 목적은 심리전이었다. 적국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으로 국내의 사기 진작과 프랑스의 사기 감소를 노린 것. 심리적인 효과는 독일 국내에서 컸다고 한다.

심리전 측면에서는 실패 병기라고 여겨지는 독일 제국 해군 항공대체펠린 비행선도 전쟁 초반에 활약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쟁 말기 체펠린 비행선은 연합국 전투기에게 마구 격추당하며 호구취급 당하며 심리전 분야에서도 퇴출되었지만 파리 대포는 끝까지 연합군을 괴롭했다는 데에 있다.

8. 해체와 은폐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독일 제국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실시한 루덴도르프 공세가 실패하고 협상국이 백일 공세를 시작하자 파리 대포가 있는 진지 근처까지 프랑스군이 진격하면서 파리 대포를 해체해야 했다. 당시 생산된 7문의 파리 대포 중에서 파리를 직접 공격했던 것은 3문이었고 그나마 3월 25일에 1문이 포신 내부 유폭으로 17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소실된 상황이었다. 1918년 8월에 파리 대포를 해체하며 독일은 포신은 물론 제조와 운영에 관한 모든 자료를 파기 및 은닉하였다. 협상군이 파리 대포를 찾아내려고 크루프사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찾아낸 것은 포받침 역할을 하던 열차를 미합중국 육군 병력들이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현재 남은 자료는 크루프 사에서 일하던 프리츠 라우젠베르거(Fritz Rausenberger)가 죽기 전에 남긴 짧은 기술이 전부다.

만약 파리 대포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살아남은 대포 중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큰 대포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폭격기나 미사일 등의 원거리 타격 수단이 발달한 현대로서는 그런 대포를 다시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현재 남아있는 대포 중에서 가장 큰 대포는 차르 대포이며 전장에 투입된 것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구스타프 열차포이다. 참고로 인류 역사상 사정거리가 가장 길었던 대포는 빅 바빌론이었지만 이쪽은 개발자 제럴드 불의 죽음과 걸프 전쟁으로 인해 끝내 완공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또한 실전 투입된 기록만 계산하자면 V3 초장거리포가 가장 사정거리가 길었다.

9. 후속

베르사유 조약에 파리 대포를 협상군에게 넘기라는 내용이 들어갔으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끝까지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장거리 화포의 개발이 금지된 이후에도, 크루프에서 지속적으로 몰래 연구하기 시작해서 21cm K 12 (E)라는 후속작을 만들어냈다. 전작인 파리 대포와는 달리[3] 열차포의 형태를 갖췄고, 최대 사정거리가 115km에 육박하는 대포로 2문이 생산되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독일 국방군의 무기로 제식 채용되어 대서양 방벽에서 영국의 해안가를 장거리 포격하는데 사용되었다. 포탄은 무려 88km를 날아갔고 켄트주 레인헴 인근까지 착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진 못했다.

10. 매체에서의 등장

쥘 베른이 1879년 쓴 인도 왕비의 유산에서 독일인 슐츠 박사가 프랑스 도시 프랑스빌에 거대한 대포를 발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작중에서는 계산 오류로 성층권 진입을 넘어 아예 인공위성이 되는 기염을 토한다. 작품 자체는 파리 대포보다 무려 40년이나 먼저 쓰여졌다.

또한 이전에 쓴 1865년작 지구에서 달까지에서는 본격 달로 가는 대포를 설정했으니, 발사 시에 지구 자전속도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미국 영토에서 최대한 위도가 낮은 지점에[4] 대포를 설치했다는 설정인 소설상의 위치가 실제 케네디 우주센터와 거의 같고 소설상 포탄의 궤도가 아폴로 계획의 궤도와 거의 일치하는 등 아무튼 쥘 베른의 과학적 상상력은 무시무시하다.


[1] 영어로는 대체로 Paris Gun이라고 한다.[2] 랭스 노트르담 성당은 흔히 랭스 대성당이라 불리며,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르던 곳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는 이름만 비슷할 뿐 다른 곳이다.[3] 파리 대포는 고정된 상태에서 발사되었고, 수송용으로 열차를 사용했다.[4] 그 외에 지형과 거대 대포를 만들 산업시설 및 수송거점을 갖춘 배후지의 위치도 감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