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덟이지만 아직 졸업반, 아니 겨우 졸업반까지 왔다. 등록금 때문에 휴학이 잦았다. 과외, 레스토랑 서빙이 끝나면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한다. 흔히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없으면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고 돈이 없어 시간마저 벌지 못하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저 견딜 뿐이다.
시간을 견딘 대가로 받는 건 140만 원 정도. 이마저도 학자금 대출을 갚고 방세, 공과금, 교통비, 통신비 등 생활비를 털고 나면 최소 생계비만 남는데. 일주일에 딱 한번 4캔에 만 원짜리 편의점 맥주를 마시는 게 유일한 사치다.
마지막으로 옷을 산 기억도 없고 올이 풀린 속옷을 입는다고 해서 여자임을 포기한 건 아니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불쑥불쑥 마주쳐오는 재완의 두 눈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연애란 사치인 걸 잘 안다. 하지만 가끔은 재완에게 기대고 싶다.
사고로 6년 째 식물인간 상태인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그가 내일 당장이라도 깨어날 것처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어머니도 있다. 하지만 병원비를, 그런 가족을 감당할 수 없었다. 불행에 잡아 먹힐 것 같았기에. 어쩌면 지원이 본다는 <벨 에포크>의 귀신이 남동생 수명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가족을 버린 죄를 묻기 위해 찾아온 동생의 영혼일지도.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사랑스러운, 러블리함의 현신이라고나 할까. 지금처럼 외모가 완성되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다. 고3때 63키로까지 나갔다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이 악물고 48키로까지 뺐다. 빼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10년째 금욕 중인 만년 다이어터.
두영과 2년째 연애 중. 자취하는 두영의 오피스텔에 수시로 드나들며 살뜰히 두영을 내조한다. 첫사랑도 두영이고 두영이 끝사랑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흔히들 먼저 좋아하고 더 많이 표현하면 지는 거라 말하지만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사랑이 두영 마저 변화시킬 것이라 생각하는 헛똑똑이.
두영의 말 한마디에, 손끝 하나에 울고 웃는 자신과 이 남자, 저 남자 자유롭게 만나는 이나를 자주 비교한다. 말로는 열등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곤 하지만 여러 남자 돌려가며 만나는 이나를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똑똑하고 당차고 정의롭기까지 하다. 이래 봬도 성적 장학금에 학보사 장학금까지 받고 있는 청년 인재. 어디 가서 얼굴로 빠져 본 적 없고, 말빨로 기 죽어 본 적 없다. 성격 좋아, 머리 좋아, 음주가무 음담패설에 능수능란한데.
그런데 당최 남자가 붙질 않는다! 팅이란 팅은 다 해보는데 성의가 무안하게 남자들이 다 튕겨져 나간다. 무려 성공률 제로. 하나 같이 재밌고 좋다며, 배꼽을 잡고 깔깔대놓고 그냥 친구로 남고 싶다는 남자들을 멱살을 잡고 물어보고 싶다. 대체 처녀 딱지는 어떻게 떼는거냐고!
어느 날 갑자기 귀신이 보인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게 하시는 건가!
길거리 지나갈 때 마다 고갤 돌리는 남자들, 내리 꽂히는 그 뜨거운 시선 때문에 선글라스를 벗을 수 없는 환상적인 미모, 몸매의 소유자.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 좋은 걸로 먹고 살고, 운동 잘 하는 사람이 운동 잘 하는 걸로 먹고 사는 것처럼 몸 좋아 몸으로 먹고 산다.
현재 세 명의 애인과 사귀고 있다. 어차피 아등바등 살아봤자 재벌 되는 사람 따로 있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 따로 있다면 굳이 어렵게 살 필요 없지 않나. 힘들게 산다고 해서 제대로 살게 되는 것 아니고 쉽게 산다고 해서 인생을 모르진 않는 법. 인생 뭐 있나. 가다 보면 지름길도 좀 타고 언덕길엔 쉬어가고 그러는 거지.
혼자 자면 악몽을 꾼다. 검은 물 밑에서 고양인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두 눈이 쳐다 보는 꿈. 지원이 본다는 귀신의 정체가 그 눈동자일까.
젖살도 채 안 빠진 싱싱한 스무 살.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돼있을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 맞이한 스무 살은 고난의 연속이다. 쌀쌀 맞은 하우스메이트 언니들 틈바구니에서 위축되고 신입생 OT를 안 갔더니 수업에 아는 친구도 없고. 말 한마디 못하고 속만 썩는데. 하필이면 윤종열이라는 복학생 선배가 자꾸 따라다니며 괴롭히기까지 한다. 서울살이가 원래 이렇게 서러운 건가.
마냥 소심이처럼 보이지만 집에선 속 깊고 든든한 맏딸. 소녀 같은 엄마가 두 번이나 비극을 겪고도 지금처럼 살 수 있게 든든히 곁을 지켰다. 새아빠 과수원에서 새까맣게 그을리고도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 엄마를 보며 행복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봉활 다녀온 지원 선배가 뜬금없이 귀신이 보인다고 했을 때 심장이 내려 앉았다. 설마. 다른 사람 눈에도 그 귀신이 보이는 건가.
처음엔 진명이 재수없다고 생각했다. 농담을 해도 웃질 않고 다 같이 한잔 하자고 말을 걸어도 먼저 가버리는 진명을 보며 대학생이라고 유세 떠는 줄 오해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악착같이 가난을, 삶을 견뎌내는 법이라는 걸 알게 됐고. 남은 재산이라곤 자존심 하나 뿐인 진명의 곁을 지켜주고 싶다.
언제 어디서건 부르면 곧장 달려오고 자취방 뒷바라지를 마다 않는 예은의 헌신을 헌신짝처럼 취급한다. 그리고 이걸 갑의 연애라 착각하고. 한 달 커피값을 아껴 기념일 선물을 마련한 예은에게 너 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예은을 안전빵으로 생각할 뿐. 이나 같이 화려한 여자를 보면서 언제고 갈아탈 궁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