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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웨식스의 첸트위네 (Centwine of Wessex) |
재위기간 | 676년 ~ 685년 |
1. 개요
웨식스 왕국의 제12대 국왕이다.2. 상세
그는 웨식스 왕조 체올계의 후손으로, 그의 두 형제인 퀴첼름와 첸왈흐[1] 모두 웨식스의 국왕이었다. 그러나 첸왈흐가 자식 없이 죽은 이후 아내인 색스부르흐 왕비가 직접 여왕이 되어 통치해 바로 왕위를 잇지 못했다.당시 웨식스는 왕위 계승에 대해 제대로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 상황에서 전례 없는 여왕의 등장에 왕국의 하위왕(underking)들과 귀족들이 난리가 났다. 당대의 유명한 수도사 베다의 기록에 따르면 첸왈흐 사후 각지의 귀족들이 왕을 칭하며 반독립적인 상태가 되는 등 10여 년간 난장판이었다고 하는데, 이 기간 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674년 색스부르흐가 죽자 왕이 될 기회가 왔으나, 이번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애스크위네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아마 찬탈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체울린계를 지지했다는걸 고려해보면 체올계와 체울린계의 투쟁이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676년 애스크위네가 자식 없이 죽자 드디어 그는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기간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은데, 얼마 없는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전쟁을 통해 왕권을 바로 세우려 한 듯하다. 알드헬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세 개의 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때문에 현대의 학자들은 캐드왈라가 웨식스를 완전히 평정하기에 앞서 그의 대에 어느 정도 웨식스가 안정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전 왕들이 2년이나 3년 단위로 짧게 재위한 것에 비해 9년이라는 상당히 장기간을 재위한 것으로 보아 더욱 타당성이 보인다.
685년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기에 그의 죽음으로 체올계는 완전히 단절된다. 왕위는 체울린계의 캐드왈라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신앙을 믿었지만, 기독교에도 우호적이었는지 교회와 기독교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실제로 그의 딸은 수도자가 되었고, 사후 성인으로 추증되기도 했다.
이네의 지지자들은 애스크위네와 그를 단순 찬탈자, 혹은 하위왕 정도로 낮게 본 듯하다. 이네가 재위하던 시절에 편찬된 베다의 기록에는 애스크위네와 첸트위네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1] 추측. 7세기의 주교이자 수도사인 알드헬름(Aldhelm)의 기록에는 앞선 왕들과 첸트위네의 혈연관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