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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3:12

베다(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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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및 중요성4. 매체에서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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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anctus Beda Venerabilis

잉글랜드수도사제, 역사가, 가톨릭·정교회·성공회성인.

베다는 672년 또는 673년에 노섬브리아 왕국 (오늘날의) 타인 앤드 위어(Tyne and Wear)주의 재로우(Jarrow)에서 태어나 735년 5월 26일 같은 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을 현대 영어로는 보통 비드(Bede)라고 하지만, 고대 영어식으로 비다(Beada), 베다(Beda)라고 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학문이 깊은 박사로 존경받았다. 817년 독일의 아헨(Aachen)에서 열린 지역공의회에서 베다를 두고 "공경받을 만한, 그리고 현대에도 경탄받을 만한 박사 베다(venerabilis et modernis temporibus doctor admirabilis Beda)"라고 지칭했다. 여기에서 베다를 두고 '공경받을 만한(venerabilis)'이라는 경의의 표현을 붙여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라고 부름이 관용이 되었다. 한국 천주교는 이 표현을 한자로 옮겨 '가경자(可敬者) 베다'라고 하였다. 현대 영어로는 Veranable Bede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축일은 5월 25일로, 영국작가와 역사가들의 수호성인이다.

2. 생애

베다의 생애는 그가 몇 살 때 있었던 일로 전하지만, 그의 생년이 672년인지 673년인지 불확실하거니와 생일을 모르므로 연도에는 늘 한두 해쯤 혼란이 있다. 일단은 본 항목에서는 그가 673년에 태어났고 생일을 넘겼다고 가정한 나이에 맞추어 연도를 병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1년 더 빨랐거나, 연도가 확실한 일이라면 나이가 한 살 더 많았을 수도 있음을 유념하길 바람.

베다의 집안이나 부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듯하다. 7살(680년쯤) 때 몽크위어머스(Monk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에 푸에르 오블라투스(Puer Oblatus)[1]로 들어가 성 베드로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수도원장 성 베네딕토 비스코프에게 교육을 받았다. 베다가 처음부터 수사(남자 수도자)가 되고자 했는지, 아니면 단지 수도원에서 교육만 조금 받다가 나올 생각이었는지는 모른다. 베다가 9살쯤 된 682년, 성 베네딕토 비스코프는 몽크위어머스 근교의 재로우에 땅을 하사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성 바울로 수도원을 세웠는데, 베다도 재로우로 가서 수도원 건축을 도우며 성 체올프리드(Ceolfrith)[2]에게 교육을 받은 듯하다.

성 바울로 수도원 건설은 685년에 끝났지만 이듬해(686) 재로우에 큰 전염병이 돌았다. 710년 무렵 익명의 저자가 집필한 <체올프리드 전기(Vita Ceolfridi)>에 따르면 이때 성무일도 전체를 노래할 수 있는 수사 2명이 살아남았는데, 1명은 체올프리드, 다른 1명은 그가 가르친 어린 소년이었다. 전기의 저자가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 소년이 13살쯤 되었을 베다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베다가 19살쯤 되는 692년 무렵, 부제서품받았다. 당시 교회법에 따르면 부제로 서품받으려면 최소한 25세는 되어야 했다. 베다가 영민하고 유능한 수사여서 예외를 허락받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영국 교회가 교회법을 잘 지키지 않았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30살 되던 해(703년쯤)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3]

이후로 베다는 평생 재로우의 수도원에서 지내며 요한 복음서라틴어 성경영어로 번역하고 글을 썼다. 그가 편집한 불가타 성경은 가톨릭에서는 1966년까지 쓰였다. 특히 그가 52세 되던 731년, 또는 732년에 탈고한 《앵글족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는 특히 중요한 대표저서이다. 이 책에서 서력기원을 채택한 것이 널리 퍼져 오늘날처럼 서력기원이 전세계에서 대중화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책은 중세시대 동안 가장 유명한 책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생전에는 평생 수도원에서 단순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성경과 학문의 권위자로 명성이 널리 알려져 '우리의 스승, 존엄한 베다'라고 불렸다. 그가 평생 수도원에서 살긴 했지만 수도원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베다가 영국 곳곳을 여행하였음은 분명하다. 베다에게 부탁을 받고 로마까지 가서 자료를 찾아 전해준 사람도 있었다.

62세쯤 되던 735년 5월 25일 오후 일몰이 지난 뒤 베다는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망한 시점이 5월 26일 0시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받아들인 관습에 따라) 하루를 전날 해가 진 다음부터 시작한다고 여겼으므로, 5월 25일 일몰 후는 당시의 관념으로는 5월 26일이었다. 그래서 베다의 사망일은 당시 기준에 따르면 논쟁의 여지가 없이 5월 26일이다.

사망 후에는 재로우의 성 바울로 수도원에 묻혔다. 813년과 836년 독일의 아헨(Aachen)에서 열린 지역공의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베다를 언급하며 '능히 공경할 만한'(venerabilis)라고 했는데, 이 단어가 그를 수식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1022년 알프레드(Alfred)라는 수사가 베다의 유골을 재로우 수도원에서 더럼대성당[4]으로 이장했다. 1370년에는 무덤을 더럼대성당 경내의 갈릴래아 경당(Galilee Chapel)으로 다시 옮겼으나, 종교개혁 시기에 경당이 파괴되었다. 베다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갈릴래아 경당으로 재안장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베다를 시성하면서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성공회와 천주교는 5월 25일을 베다의 축일로 기념한다

3. 평가 및 중요성

가경자 베다는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예수의 추정 탄생년도를 기준으로 삼아 만든 서력기원을 일상적인 기년법으로 끌고와 확립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중요하지만, 동시에 역사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저술한 <세계 역사>와 <앵글족 교회사>는 초기 앵글로색슨사 및 로만 브리튼 이전 역사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것이다. 역사 서술 면에서는 앞선 시기 프랑크 왕국의 역사서를 집필한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전자는 몰라도 <앵글족 교회사>는 베다가 앵글로색슨 통사를 저술하려는 목적으로 쓴 책이 아니다. 그래서 책의 목적 자체도 사도행전의 구조를 모델로 삼아 앵글로색슨족을 기독교화한 과정 및 앵글로색슨 교회의 여러 성인들의 일대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워낙 사료가 없는데다가 있는 사료도 소실되는 판이라 졸지에 초기 앵글로색슨사를 다룬 유일한 당대 사료가 되어버렸다. 영국에선 삼국사기나 다름없는 <앵글로색슨 연대기> 기록 중 당대의 것이라 할 만한 부분은 <앵글족 교회사>를 복붙하며 시작한다. 초기 웨식스사 및 동앵글리아, 에식스와 같이 초기 역사가 불명확하거나 자세하지 않은 나라들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다. 다만 웨일즈 지역이나 스트래스클라이드 지역처럼 켈트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시대의 한계로 인해 자료를 얼마 모으지 못한지라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편이다.

물론 베다도 사람인데다가 애초에 역사서 목적으로 집필하질 않았으니 오류도 종종 범하였으나[5], 전후사정을 고려하면 그가 쓴 책이 현대까지 전해져 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읍해야 할 지경이다.

4. 매체에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천국편 제10곡에 언급되는 유일한 잉글랜드인. 직접 등장해서 단테와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과 함께 원을 이루는 영혼들을 소개할 때 이름만 나온다. 14세기 초 단테가 신곡을 쓰던 무렵에는 베다가 공식적으로는 성인도 교회학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단테가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잉글랜드인으로 베다를 들었음은 그만큼 베다가 이탈리아에까지도 알려진 인물이란 뜻일 것이다.

5. 관련 문서



[1] 라틴어로 '(하느님께) 봉헌된 소년'이라는 뜻.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희망하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회 절차를 밟지는 못하고 수도원에 거주하며 지내는 아이를 말한다. 한국 천주교의 일부 서적에서 '수도 지원 아동'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이런 제도는 없어졌고, 수도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만 18세 이상에 고등학교 졸업 이상이라야 입회가 가능하다.[2] 생몰년: 642?-716. 이름 음역은 고대 영어를 따랐다.[3] 가톨릭에서 수도자 신분과 성직자 신분은 별개이다. 수도자이면서 또한 성직자 자격도 받은 이를 한국 천주교는 총칭하여 '성직수사'라고 부른다. 또한 성직수사 중에서도 신부인 이를 흔히 '수사신부'라고 부르는데, 베다 또한 수사신부였다.[4] 해리 포터 시리즈의 촬영지인 더럼 대학교 내에 있다.[5] 무엇보다도 앵글로색슨의 기독교화 과정을 서술하는 태도 자체가 저자 본인의 사견이 깊게 개입되어 있다. 게다가 역사 서술의 측면에서도 저자의 고향인 노섬브리아 위주로 서술되어 있고, 특히 머시아 왕국에 대한 정보는 자료 수집이 어려웠는지 사실관계가 가장 부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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