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최영숙 | |
출생 | 1906년 |
경기도 여주 | |
사망 | 1932년 4월 23일 오전 11시 (향년 25~26세) |
홍파동 자택 | |
직업 | 여성운동가, 노동운동가 |
학력 | 여주보통학교 이화학당 명덕여학교 회문여학교 스톡홀름 대학교 (정치경제학과 / 1931년 학사) |
[clearfix]
1. 개요
한국 최초의 여성 경제학 전공자로 알려진 인물.2. 생애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여주보통학교[1]와 이화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23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난징 명덕(明德) 여학교와 회문여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다. 특히 몇 달 만에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정도로 언어구사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1926년에는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나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최영숙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한 포목상 가문이었지만, 스웨덴 유학비용을 모두 지원하기는 어려웠다. 최영숙은 자수(刺繡)를 놓아 팔거나 아돌프 황태자가 수집한 자료를 스웨덴어로 번역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4년 간의 중국 유학과 5년 간의 스웨덴 유학 끝에 1931년 말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가 되어 귀국하였으며, 당시 보기 드문 여성 엘리트였기에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최영숙은 스웨덴에서 여성들의 자유로운 사회생활과 노동자들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조선도 여성과 노동자가 권리를 인정받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부유했던 최영숙의 집안은 그녀의 귀국 즈음에 몰락해 있었고, 최영숙이 스웨덴에서 모아두었던 돈은 귀국길에 여행과 요양으로 다 써버렸던 터였다. 당장 먹고 살 방안부터 찾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대공황의 여파로 대졸자 실업률이 50%에 육박할 정도였다. 특히 조선인과 여성 차별이 심각했던 때라, 조선인 여성인 최영숙은 특히 더 심한 취업난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최영숙은 대학 교수, 교사, 기자 등 여러 일자리를 알아봤다. 하지만 유학 경험과 경제학 학사 학위, 5개 국어(영어, 스웨덴어, 중국어, 독일어, 일본어) 구사능력이라는 뛰어난 능력과 인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서대문 밖 거리에 작은 구멍가게를 인수해서 콩나물, 미나리, 배추 등 부식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마저도 그리 잘 되는 편이 아니라 늘 생계가 어려웠다.
심지어 최영숙은 귀국길에서 만나 잠시 인도에서 함께 지냈던[2] 인도인 청년 로이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상태였다. 임신 중에 겪게 된 경제적 곤란과 과중한 스트레스로, 결국 귀국 5개월 만인 1932년 4월 실신하여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다. 최영숙은 낙태 수술을 받았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고 자택으로 돌아갔다.
결국 4월 23일 최영숙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영숙에게는 남겨놓은 재산이 없었고, 부모도 마찬가지 형편이라 친구인 임효정 여사가 장례비를 내주었다. 묫자리를 쓸 돈조차 없어 화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최영숙이 사망한 며칠 후에, 로이로부터 "인도에 와서 함께 살자"는 편지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