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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1:57:59

최재(1079)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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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梓
(1079 ~ 1151)

1. 개요

고려의 문관. 공암현(孔嵒縣) 출신으로 자는 대용(大用)이다.

2. 생애

음서로 장사랑 장례승동정(將仕郞 掌醴丞同正)에 임명되고 숙종 7년인 1102년 24세의 나이로 예부시(禮部試)에 병과(3등)로 급제한다. 당시 지공거(知貢擧)는 지주사(知奏事) 윤관, 동지공거는(同知貢擧) 사재경(司宰卿) 이굉(李宏)이다. 숙종 10년인 1105년 제기도감판관(祭器都監判官)에 임명되고 이후 산정도감(刪定都監)의 어사((御史), 공부의 관직, 위위시(衛尉寺)의 주부(注簿)를 역임한다.

예종이 즉위한 뒤에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에 임명됐다가 수주(水州)[1]와 홍주(洪州)[2]의 수령(首領)을 지낸다. 임기를 마치고 교대한 뒤에는 대부주부 권지감찰어사(大府注簿 權知監察御史)에 임명됐고 수개월 뒤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다. 안찰사(按察使)에서 최재가 두 주의 수령으로 남긴 공적을 보고해 인종이 최재를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발탁한다. 어사로서 불법을 탄핵, 규찰했으며 3년 뒤 상서형부낭중(尙書刑部郞中)이 된다. 이듬해 인종 4년인 1126년 6월 예빈소경(禮賓少卿)에 올라 3품의 관복을 받고,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에 자사(刺史)로 나가게 된다. 3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도관낭중(都官郞中)으로 좌천되는데, 형부낭중(刑部郞中), 급사중(給事中)을 거쳐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에 오른다. 그 사이 인종 8년인 1130년에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청절(天淸節)을 축하하고 온다.

인종 12년인 1134년 조산대부 위위경(朝散大夫 衛尉卿)에 오르고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에 임명되어 서경으로 간다. 부유수(副留守)에 있는 동안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난다. 인종 14년인 1136년 상서예부시랑 좌간의대부(尙書禮部侍郞 左諫議大夫)에 오르며 관직이 여러 번 바뀐다. 품계는 조의대부(朝議大夫)[3]에 이르며 비서감 직문하성(秘書監 直門下省),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어사대부(御史大夫), 공부상서(工部尙書) 등을 맡는다. 인종 23년인 1145년 3월 동지추밀원사 태자빈객(同知樞密院事 兼 太子賓客)이 되고 12월에 호부상서 지추밀원사(戶部尙書 知樞密院事)로 바뀌며, 의종 즉위년인 1146년 12월에 은청광록대부[4] 검교사도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예부사(銀靑光祿大夫 檢校司徒 守司空 尙書左僕射 叅知政事 判禮部事)에 이른다.

의종 원년인 1147년 최유청서경 열명(說命) 3편 강론을 청강한다. 의종 2년인 1148년 검교태위(檢校大尉)에 오른 뒤 퇴직해 자택에 돌아간 뒤에는 문을 닫아걸고 욕심 없는 삶을 살며 타인과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의종 5년인 1151년 10월 15일 병으로 자택에서 사망한다.

3. 가족관계

조상 대대로 관직을 지냈다. 증조부인 최후는 사후 관직이 거듭 추증되어 태자소사(太子少師), 최영은 태자태사(太子大師)에 이르렀으며, 최저는 수광록대부 형부상서(守光祿大夫 刑部尙書)를 지냈다.
참지정사(叅知政事) 왕하의 딸 개성군부인과 사이에서 4남 4녀를 둔다.

[1] 현재 경기도 수원시[2]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3] 정5품하[4] 정3품[5]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손유(孫裕)의 딸[6] 이부시랑(吏部侍郞) 박순충(朴純冲)의 딸[7] 분사사재소경(分司司宰少卿) 황공위(黃公偉)의 딸[8] 기거주(起居注) 이원응(李元膺)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