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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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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 Dejima
파일:external/sky.geocities.jp/img0291.jpg
파일:external/bdaa396cc17e6e1aa97db045691d8e91b24bb9c7c82dd0786469326de8338e38.jpg
위의 그림들에서 네덜란드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
1. 개요2. 역사3. 복원사업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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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사키시에 있는 에도시대 일본무역관계에 있던 네덜란드를 위해 에도 막부에서 설치한 무역 거주구.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이며, 면적은 1.5헥타르, 0.013~0.015km²로 축구장 2개 넓이보다 조금 큰 정도. 일명 쇄국 일본의 숨구멍.

2. 역사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덜란드와의 무역 및 교류가 이루어진 유일한 장소였다. 이곳을 통해 들어온 서양학문, 즉 '난학'은 뒷날 근대 서구문명의 쇄도에서 일본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완충제 구실을 톡톡히 한다.

본래는 포르투갈인들을 좁은 곳에 몰아넣어 쉽게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막부가 나가사키의 유력자 25명에게 명령하여 1634년부터 1636년까지 건설되었다. 지금 금액으로 4억엔(40억원)정도가 들었으며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매년 임대료를 내면서 거주하였고 네덜란드인들로 바뀐 뒤로는 교섭을 통해 비용을 깎았는데 깎은 금액이 현재 금액으로 1억엔(10억원)정도였다.

1637년시마바라의 난이 발생하자 막부는 기독교(가톨릭) 포교를 이유로 1639년에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여 데지마에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는데 이에 데지마에 자금을 투자했던 지역유력자들의 불만이 있자,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을 데지마로 옮기게 된다.

매년 7~8월에 2척의 배가 입항하여 12월에 출항할 때까지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에는 네덜란드인 선원 등으로 북적였지만 배가 없을 때는 상관장(商館長)[1] 및 부상관장, 서기, 창고지기, 목수, 조리사, 흑인 잡부 등 15명 내외의 인원만 거주했다.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데지마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대표인 상관장은 에도에 연례인사 목적으로 가는 일이 있었다. 데지마의 행정 관할은 원칙적으로 일본 측인 나가사키 부교(奉行)에게 있었고 일본 측 인원들도 상당수 데지마로 출입하여 업무를 보았다. 금제(禁制)라는 규율이 있었는데, 허가받지 않은 일본인은 데지마에 출입할 수 없었으나 유곽의 창녀는 출입해서 성관계를 맺어도 처벌받지 않았다.[2] 실제로 남은 그림 등을 보아도 데지마 안에서 일본여성들을 끼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 등이 남아 있다.

일명 난학이라 불리는 서양학문을 접하는 통로가 되었다. 난학이란 홀란드(Holland)를 음차한 '화란(和蘭)'[3]에서 따온 말이다. 당시 일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뇌전기의 발명이나 세키 다카카즈의 미적분 발견, 미우라 바이엔의 변증법 제시를 이끌기도 했다.[4]

그러나 데지마에서는 외국인과 일본인이 엄격히 구분되었으며, 쇄국 정책은 데지마 관리 정책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인을 포함한 외국인은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통역은 일본 쪽에서만 네덜란드어를 학습한 일본인 통역관을 나가사키 부교가 고용함으로써 제공되었다. 네덜란드인은 일본인 통역사를 고용할 권리도 없었다. 통역관직은 종종 세습되었으며, 많은 경우 직업을 바꿀 권리조차 없었다. 통역관들은 네덜란드인들을 관찰하다가 이상 행동이 보이면 부교쇼에 보고해야 했다.[5]

3. 복원사업

파일:데지마 현재 위치.png
파일:2021년 데지마.jpg
현재의 데지마
인공섬이었던 데지마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무역기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 추가적인 간척 및 매립공사 등을 통하여 사실상 섬도, 특수 구역도 아닌 일반 거주지로 바뀌었다.
파일:external/userdisk.webry.biglobe.ne.jp/126770076143616419789.jpg
데지마 모형
1922년에 네덜란드 상관 옛터로 국가지정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한때는 축소모형과 위치를 알리는 표지 정도만 남아 있었다. 나가사키시는 데지마의 복원을 시 중점사업으로 내걸고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점점 원래 위치에 복원 중이다. 2차대전 후 패전국인 일본이 네덜란드 측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으나, 배상금 대신 데지마의 복원을 요구했다고.[6] 1951년부터 복원계획이 시작되어 고증, 소유지 매입 등 사전작업 및 계획에만 45년이 걸렸다가 1996년에야 첫 삽을 뜨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nagasaki-showataxi.jp/ac77fb48e0f1bea3357a1ea42819f676.jpg
파일:external/www.city.nagasaki.lg.jp/SBSH01391111.jpg
복원된 데지마. 빌딩 등이 위치해 있어 일부만 복원되었다.
1기 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2000년에 5채의 건물을 복원했으며, 2기 사업에서 카피탄 및 5채의 건물을 2006년에 완성했고, 3기에 6채의 건물이 세워지며 2016년 시점까지 16채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다만 지속적인 매립 등으로 해안선과 주변 환경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그림에 나온 것처럼 재현하지는 못하고 경계구역에 해자 비슷한 것을 파는 식으로 복원할 모양.

4. 여담


[1] 카피탄이라고 불렀다. 이는 본래 포르투갈어로 영어의 Captain과 같은 단어인데 상대국이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바뀐 뒤에도 일본에서는 계속 사용했다. 네덜란드에서는 Opperhoofden이라고 불렀다.[2] 조선에서의 비슷한 기능의 시설인 왜관을 출입했던 조선인 여자들이 발각되어 모두 참수 등 극형에 처해진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3] 당시 홀란드 지역은 네덜란드의 중심부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홀란드는 곧 네덜란드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지금도 네덜란드의 일본어 명칭은 홀란드의 일본어 음역인 オランダ(오란다)이다.[4] 박성래 외 2인, '과학사', 전파과학사, 2013, p341-342[5] 17~18세기 아시아 해항도시의 문화교섭, 34-37쪽.[6] 나폴레옹 전쟁 당시 본토는 프랑스에 점령당하고 식민지는 영국에게 점령당한 상태에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령(?)으로 남아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라나. 아무튼 네덜란드 입장에서 역사적인 장소인 것은 맞다.[7] 해체신서를 집필한 스기타 겐파쿠 등 이전까지 일본인 난의들은(서양의술을 공부한 의사들) 직접 네덜란드어를 공부하든지 일본인 네덜란드어,포르투갈어 통번역관들의 도움을 받아, 데지마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학서들을 보고 독학하거나, 정부의 눈을 피해 서양의사들과 접촉 할 수밖에 없었다. 지볼트는 막부의 허락과 특혜를 받고 외국인들중 최초로 데지마 바깥에서 일본인들에게 직접 서양의학을 강의했다.[8] 지볼트는 일본의 문물을 수집했는데, 이 중에는 일본에서 해외로 반출하는 것이 금지된 일본의 지도들이 있었다. 이것을 적발당해서 지볼트에게 지도를 준 타카하시 카게야스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다가 옥사했고 지볼트는 상기대로 추방당했다.[9] 이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다. 메텔 항목 참조.[10] 막부는 일본인은 물론 혼혈인 자식에 대해서도 외국으로 가는 것을 엄금했기에 지볼트가 추방될 당시 그녀들은 일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11] 37년은 긴 세월이고, 딸이 혼혈이라 차별당하면서 살았고, 실제 역사에서 딸 이네가 의술을 가르쳐 준 스승인 이시이 소우겐에게 강간 당하면서 타카코를 낳았고, 손녀인 타카코 역시 의사가 되려 했지만 카타기리 시게아키라는 남자에게 강간 당하면서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다만 작중에서는 딸과 손녀가 강간당한 건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면서 언급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