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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8 10:55:03

치데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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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치데축찬 시기의 대외관계
3.1. 당나라와의 관계3.2. 남조국과의 관계

1. 개요

墀德祖贊, ?~754
티데쭉짼(ཁྲི་ལྡེ་གཙུག་བཙན།)[1]
토번 제국의 4대 첸뽀. 당에 대해 여러 차례 공세를 취하나 수세에 몰리고, 이후 왕권강화를 하려다 암살당한다.

2. 생애

704년 첸뽀 치둑송첸이 톤미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네팔로 원정을 떠났으나 풍토병으로 죽자, 내란이 일어났다. 다행히 망송망첸의 아내이자 토번의 외척 세력의 수장인 치마레가 치둑송첸의 유복자를 찬포로 옹립시키고 내란을 종식시킨 뒤 첸뽀의 자리에 올랐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치마레가 섭정을 할수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치둑송첸의 숙청으로 인한 왕권강화는 다시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제위에 있던 시기는 당나라에 대해 수세였던 상황이었다.

754년 숨파국 출신의 귀족에 의해 암살당하였다.[2]

3. 치데축찬 시기의 대외관계

3.1. 당나라와의 관계

704년 치둑송첸이 병사하고 토번 내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치마레가 내란을 종식시켰으나, 치마레의 섭정으로 인해 황권강화가 수포로 돌아갔다. 당나라에서는 705년 신룡정변으로 무측천이 퇴위하자 중종이 복위했는데, 이 당시 중종은 돌궐에 시달리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한 뒤, 토번과 화친해야 했다. 이를 위해 중종이 오르도스 지역에 삼수항성을 쌓고 또 토번에는 하서구곡 지역[3]을 할양하는 등 토번과 화친을 맺었으나, 710년 중종이 암살당하면서 돌궐 북벌은 물거품이 되었다.

712년 치마레가 사망한 이후 재상 상음장(尙飮藏)으로 하여금 당과의 국경선을 확정했고 713년 당은 석보성(石保城)을 신축해 토번을 견제했으며 714년 6월 양국은 국경선을 확정지었으나 당은 한편으로는 10만 군세를 국경에 배치시키기도 하며 또한 사천성의 당과 토번사이의 다리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과연 8월 토번의 분달연[4]과 걸력서(乞力徐)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임조를 침략했으며 동시에 난주(蘭州), 위원(渭源)에 대하여 전면적인 공격태세를 취하였으나 설눌에 의해 격퇴당한다.[5][6]

716년 돌궐의 묵철이 바이르쿠의 패잔병들에게 암살당하자[7] 당의 군사력은 더욱더 토번과 서역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토번도 이에 무차별적인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719년 일시적으로 화친하였으나 722년 소발률(小勃律)을 공격하여 안서사진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격퇴당했고 이로인해 다시 화친은 깨졌다. 724년 당이 하서일대에서 토번에 대승을 거두고 토욕혼 지방의 토번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727년, 숨파국의 왕자였던 실뤄라가 하서 일대에 강력한 공세를 가하였다. 이로 인해 재상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토번에서는 이를 기리는 사원까지 건립될 정도였는데, 당시 하서절도사였던 소숭이 이간계로 실뤄라를 제거한다.[8] 그로 인해 토번의 공세는 쇠약해졌고 728년 토번의 안서도호부 공격이 실패함에 이어 당은 사천, 청해 일대에 강력한 공세를 가하였는데, 토번은 이를 감당하지 못해 730년 결국 화친하게 된다.

그러나 토번이 안서 지역에 대한 야욕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717년 토번은 공주 한명을 튀르기시[9] 가한 소록에게 시집 보냄으로서 서역 진출을 재차 시도하였고 730년 초기에는 연합작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738년 소록이 살해당하고 튀르기시가 복속됨으로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737년 토번이 재차 소발률을 공격하자 당과 토번과의 관계는 다시 마찰을 빚었는데, 끝내 청해호 인근에서 당군이 토번군을 기습공격함으로서 양군의 화친은 결렬되었으며 결국 토번이 칭하이 일대를 다시 빼앗겼다.

740년 금성공주가 사망 이후 토번이 대발률을 격파하고 부재상 게쌍돈줍[10]의 계책으로 소발률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로 인해 서역 20개국이 토번에게 조공함으로서 당의 입지는 많이 약화되었다. 여세를 모아 741년 토번은 다시 군사를 모아 청해호 근방을 공격함으로서 반격을 가하자 당이 철수하였으나 741년 장구겸경이 계략으로 안융성을 점령함으로써 토번, 남조국과의 연계를 차단했다. 소발률 일대에서는 토번의 영향력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747년 고선지가 소발률을 격파했으며 이로 인해 서역 72개국은 다시 당으로 귀속됨으로써 서역의 주도권은 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11] 749년 당나라의 가서한이 석보성을 함락시켰고[12], 753년에는 하서구곡을 수복하는 성과를 이룬다.[13]

3.2. 남조국과의 관계

각라봉 즉위 이후 남조국은 당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751년 각라봉이 운남태수 장건타를 참살하였고 이에 검남절도사 선우중통이 남조를 침공했는데, 각라봉은 이에 사죄했으나 선우중통은 이를 무시하고 남조국을 침공하였는데, 결국 패하고 선우중통은 몸만 빼내 달아났다.[14] 이후 양국충이 두 차례 걸쳐 남조국을 침공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15], 결국 토번 제국과 남조국은 동맹을 맺게 된다.



[1] 동국대학교 티베트장경연구소 티베트어 한글 표기법에 따른 표기. 와일리 표기법에 따르면 'khri lde gtsug btsan'으로 쓴다. '티데쭉땐(khri lde gtsug brtan)'이나 '티데쭉짼(khri lde gtsug brtsan)'같은 표기도 사용된다.[2] 낙마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3] 하서구곡 지역은 유목에 매우 좋은 지방임과 동시에 토번이 하서와 관중일대의 공격을 위해 중요한 요충지였다.[4] 토욕혼 출신의 토번 장수. 치둑송첸을 도와 가르 가문의 숙청에 일조한다.[5] 설눌 밑에는 안사순, 왕해빈, 왕준 등이 밑에서 활약하였다.[6] 이에 분노한 이융기는 토번으로 친정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만류하였다.[7] 부구가한이 가한 자리에 올랐으나 퀼테긴, 비가가한에게 자신은 물론 묵철의 일족 모두가 주살당하고 빌게가 가한의 자리에 올라 혼란을 수습했으나, 묵철과 같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8] 자치통감에서는 주살되었다고 나와 있는 반면 티베트측 기록은 단순 낙향. 티베트 야사는 낙향중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고 한다.[9] 서돌궐의 별부[10] 치데축찬 시기 토번국의 부재상. 돌궐과 우호관계로 지내야 할 것을 주장하였고 소발률과 혼인동맹을 맺은 뒤 당의 2차례 침입을 소발률에서 격파하나 고선지에게 패하였고, 토욕혼 일대를 공격하여 빼앗긴 영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였다.[11] 참고로, 751년 고선지가 탈라스에서 아바스 조의 군대에 대패하였으나, 753년 고선지의 후임 안서절도사였던 봉상청이 대발률국을 정복하는 등 안서도호부의 강역을 넓혔고, 안사의 난 이전까지 서역에 미치는 당의 영향력이 막강했다.[12] 성을 지키는 토번군은 수백이었으나 당나라군의 사상자는 수만이었다.[13] 하지만 치데축찬 사후 치쏭데쩬이 첸뽀에 오른 뒤, 755년 안사의 난을 계기로 하서와 농우를 지키는 정예병 상당수가 반란 진압에 투입된 틈을 타, 토번군은 하서와 농우 일대를 점령하였고 그로 인해 당은 서역으로 가는 통로가 단절되었다.[14] 선우중통이 이 사실을 승전으로 허위 보고하나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 결국 실각하고, 755년 사망한다.[15] 이는 당군이 강제로 징집된 데다가 남방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