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마키 | |
출생 | 1951년 5월 18일 ([age(1951-05-18)]세) |
연합군 점령하 일본 카나가와현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1951~1993) [[일본| ]][[틀:국기| ]][[틀:국기| ]](1993~)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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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가수.일본 록계 초창기에 보기 드문 여걸로서 일본의 재니스 조플린으로 통하는 가수다.
2. 생애
時には母のない子のように 라이브.
1951년 일본인 어머니와 유대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출생부터 아버지따라 서류상으론 미국 국적으로 쭉 활동했지만[1] 이때의 본명은 'Maki Annette Lovelace'였다고.[2] 정작 미국에서 자라온 이력은 드물었고 사실상 일본에서 자라온 토박이나 나름없던 신분이었다. 아버지는 태어나고 얼마안가 미국으로 떠났다고 하니 여러모로 인순이와도 비슷한 태생 배경. 이후 일본 국적은 1993년 되어서야 뒤늦게 취득하고 만다.
어려서부터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예능인의 길을 걸었던 그녀의 데뷔는 음악이 아닌 배우였다. 그러나 짧막한 연극이나 드라마 조연 정도가 필모그래피의 전부였고 본격적인 활동은 소속사의 눈에 들어 가수로서 연마된 이후였다. 1969년 발표된 데뷔작 '時には母のない子のように(때론 엄마없는 아이처럼)' 곡으로 밀리언셀러에다 홍백가합전 초청까지 이끌어냈던 신인답지 않은 저력을 보여줌으로서 그녀에게 스타덤이란 칭호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일찍이부터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성 포크 내지 소울 가수로서 대중들의 눈도장을 찍어오면서 소속사의 주도로 다작을 펼쳐오기도 했다.
그러다 이듬해부터 재니스 조플린에 심취하던 그녀는 아이돌에서 아티스트로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이를 성사시키기까지 과정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는데, 초반 결성했던 '카르멘 마키 & 타임머신'은 1년도 안되어 단명해버리고 크리에이션의 작품에 보컬로 참여하던 작품들까지 큰 반향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소속사와도 돈벌이 안되는 행보 때문에 꽤나 갈등이 깊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영건 세션들 가스가 히로후미(기타),[3] 나루세 요시히로(베이스),[4] 히구치 아키유키(드럼)와[5] 함께 결성한 1972년 카르멘 마키 & OZ는 록커로서의 활동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어준다. 연극을 갈고 닦아온 그녀답게 함께 라이브 무대에서 실력을 갈고닦다 1975년 발표한 셀프 타이틀 앨범 'Carmen Maki & Oz'는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쾌거를 이룬다. 대담한 프로그레시브 록 진행과 핫피 엔도의 유산이자 카르멘 마키가 손수 짜낸 섬세한 가사도 높이 평가받아 상업과 평단 두마리의 토끼를 잡아낸 이 작품은 현지에선 오늘날까지도 클래식 반열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사실 이 성공가도 속에서도 기타 가스가를 제외한 멤버들은 수도없이 교체를 감행한 복잡한 여로가 있었고 밴드도 결국 1977년 해산을 맞아 각자도생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때까지 내놓은 음반은 정규음반 3장, 라이브 앨범 1장. 이 라이브 앨범도 나름 당대의 일본 라이브 발전상을 대변하는 효시로도 평가받는다.
해산 이후로도 밴드 활동과 솔로를 번갈아가며 활동은 이어오긴 했지만 그리 반향은 크진 않았고, 중간엔 약물 파동 스캔들로 수난에 놓인적도 있었다. 밴드 'うるさくてゴメンねBAND(시끄러워 미안해 밴드)'를[6] 짧막하게 진행하다 결혼과 육아 휴양으로 연예계에선 잠시 은퇴를 고하게 된다. 이후 1993년 일본 국적을 획득한 후 복귀해 활동중이다.
일본 기타리스트 Char의 은인이라고 한다. 1978년 연예계에서 퇴출 직전에 몰려 실의에 빠진 Char를 자기 투어 백밴드로 데려와 연주하게 했고, 이걸 계기로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디스코그래피
[1] 일본은 1965년생 이전까지는 아버지가 일본 국적일때만 자식에게도 일본 국적을 부여했기에, 아버지가 미국인인 마키는 미국 국적만 가지고 있었다. 일단 일본은 복수국적이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나라인지라 일본 국적을 취득한 후로도 미국 국적을 유지할 가능성도 있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2] 일본 국적 취득 뒤로도 이 본명을 유지중인지 일본식 이름 (이토 마키라고 한다.)으로 개명했는지도 불명이다. 현재의 본명은 비공개인 상태인데, 일본 여성의 성씨가 결혼 때문에 바뀌기 쉽다는 걸 감안하면 혼인/이혼 여부를 노출하기 싫다는 의도로 보인다.[3] 훗날 국내에서 하치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장사하자 노래로 유명한 그분 맞다.[4] 훗날 카시오페아 멤버로서도 활동하던 테크니션으로 명망높은 세션이다.[5] 크리에이션 활동 당시 동반으로 밴드를 결성하고자 나온 사이였다.[6] 여기서의 멤버론 OZ 시절 초창기 베이시스트 나루세 요시히로도 재회하기도 했고 훗날 B'z멤버로 유명한 마츠모토 타카히로의 등용문으로도 의의있는 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