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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24 23:27:43

카바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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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22대, 24대 샤한샤
𐭪𐭥𐭠𐭲 |카바드 1세
파일:카바드 1세.jpg
제호 한국어 카바드 1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𐭪𐭥𐭠𐭲
영어 Kavad 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473년~531년 9월 13일
재위 기간 488년~496년, 498년 또는 499년 ~ 531년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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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22, 24대 샤한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겨가며 파탄 국가로 전락한 제국을 어느 정도 정비해 호스로 1세의 영광의 기반을 마련한 명군이다.

2. 생애

카바드(Kavad)는 카야니 족의 왕 카비 카바타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명칭이다. 이 이름은 그리스 어로 카바티스(Kabates), 중국어로 취허토(Chü-he-to), 아랍어로 쿠바드(Qubādh)로 번역된다. 페로즈 1세의 아들로, 요안니스 말라라스에 따르면 그가 사망할 때 82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449년생일 것이다. 반면에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484년 페로즈 1세가 실패로 끝난 에프탈 원정에 착수했을 때 어린 나이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카바드가 488년경 15세에 샤한샤가 되었다는 디나바리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의 첫번째 통치의 대다수 주화는 짧은 수염만 있고 콧수염이 없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는 카바드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젊은 나이였음을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따라서, 그는 473년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70년대 후반, 페로즈 1세는 에프탈 원정에 착수했다가 매복에 걸려 사로잡힐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에프탈 군주에게 엎드려 절하고, 노새 20마리에 황금을 가득 싣고 아들 카바드를 인질로 보낸 뒤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484년, 페로즈 1세는 재차 에프탈 원정에 착수했지만 함정에 빠져 전사하였고 사산 왕조군은 괴멸되었다. 그 후 형을 대신하여 내정을 이끌고 있던 발라시가 샤한샤로 즉위했다. 에프탈 왕 아흐순와르는 메소포타미아까지 쳐들어갔다가 수크라에게 패한 뒤 사산 왕조와 평화 협정을 맺기로 했다. 에프탈은 사산 왕조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전면 철수하기로 하였고, 일찍이 인질로 있던 페로즈 1세의 아들 카바드 1세를 크테시폰으로 돌려보냈다. 발라시는 카바드를 정적으로 여겨 처형하려 했지만, 수크라의 중재에 따라 감옥에 가뒀다. 하지만 카바드 1세는 기적적으로 탈출한 뒤 에프탈로 망명했다.

488년, 카바드 1세는 에프탈의 지원에 힘입어 크테시폰으로 진격했다. 당시 발라시는 귀족 및 조로아스터교 사제들과 대립한데다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도 마련하지 못해 군대의 지지마저 잃어버렸다. 그래서 카바드는 손쉽게 크테시폰에 입성하였고, 삼촌의 눈을 실명시킨 뒤 수크라, 미흐란 등 유력 가문의 지지로 샤한샤에 등극했다. 하지만 당시 제국의 처지는 매우 좋지 않았다. 에프탈은 제국의 동방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고 막대한 공물을 받았다. 또한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는 중앙의 지시에 불복종하였고, 아랍 부족들은 제국의 남방 영토를 거리낌없이 약탈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비참하게 살아야 했고,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카바드 1세는 491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한편, 그는 집권 후 5년간 수크라의 지도를 받았다. 수크라는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전군을 자신의 지휘하에 두었으며, 귀족들은 명목상의 군주인 카바드 대신 그를 따랐다. 493년 성년이 된 카바드는 수크라를 그의 고향인 시라즈로 보냈다. 그러나 수크라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카바드는 어떻게든 그를 제거하고 싶었지만, 군대가 그를 지지하는 상황이었기에 무력으로 토벌할 수 없었다. 이에 미흐란 가문의 강력한 귀족이자 수크라의 정적인 레이의 샤푸르를 부추겼다. 샤푸르는 시라즈로 쳐들어가서 수크라를 격파하고, 그를 크테시폰으로 끌고 간 뒤 처형했다. 그러나 이 일은 많은 귀족의 반발을 샀고, 카란 가문은 타바리스탄과 자불리스탄 지역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지배자 노릇을 하였다. 여기에 미흐란 가문이 득세하면서, 카바드 1세는 여전히 허수아비 취급을 받았다.

그는 어떻게든 귀족들의 통제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고, 당시에 유행하던 마즈다크교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즈다크교의 리더 마즈다크는 폭력을 반대하고, 모두가 여성 및 재산을 완전히 공유해야 하며, 동등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을 후원하여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귀족들은 이러한 샤한샤의 행보에 분노하였고, 496년 정변을 일으켜 카바드를 폐위하고 동생 자마습을 새 샤한샤로 옹립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카바드를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그래도 한때 샤한샤였던 자를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후제스탄의 '망각의 요새'라 불리는 감옥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그는 극적으로 탈출한 뒤 에프탈에 망명했다.

카바드는 에프탈 왕의 딸과 결혼한 뒤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에프탈은 이를 수락하여 498년 또는 499년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갔다. 자마습은 붙잡힌 후 실명되었고, 카바드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구스나스파드를 비롯한 귀족들은 처형되었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용서받았고, 그는 자신을 도운 아데르고운바데스를 국정을 총괄하는 높은 지위에 앉혔고, 시야후시를 사산군의 수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시야후시는 얼마 안가서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협상을 잘못 처리한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카바드는 또 다른 궁정관리인 마흐부드를 새 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는 파탄 지경에 이른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조세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조세를 공평하게 거두기 위해 인두세를 신설했고, 과세 대상 토지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이 조사는 후계자인 호스로 1세 대에서야 완료되었고, 호스로 1세는 이를 토대로 막대한 세수입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카바드는 제국을 4개의 방위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군 사령관을 두었다. 그리고 병사들이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여러 곳에 군용품점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가난한 자의 옹호자이자 재판관'으로 알려진 새로운 사제 계급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카바드는 소규모 토지를 소유한 데칸 계급을 중용하여 기병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이는 파르티아 기병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에 백훈족, 아랍 등 주변 국가들의 거주민들을 용병으로 끌여들어 군대를 보충하였다.

하지만 이 많은 개혁을 추진하고 에프탈에게 공물을 바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는 502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다시 돈을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로마 제국은 또다시 거부했다. 카바드 1세는 실력행사를 하기로 작정하고, 에프탈과 연합하여 국경 도시 테오도시오폴리스와 아르메니아와 인접한 로마 영토를 습격하고, 동로마 국경의 주요 요새 중 하나인 아미다로 쳐들어가 503년 초 오랜 공성 끝에 함락하였다. 하지만 에데사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고 505년 캅카스 일대에 훈족이 쳐들어오자 전쟁을 중단했다. 506년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는 대신 아미다를 돌려줬다. 이리하여 사산 왕조는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였고, 카바드는 이를 통해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또한 508년 동방으로 출진하여 호라산 일대를 탈환하여 동방 전선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

개혁이 착실하게 진행되던 520년대, 카바드는 마즈다크를 더이상 후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모든 지위를 폐지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즈다크의 주장은 샤한샤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샤한샤는 마즈다크의 추종자들을 정원으로 유인한 뒤 머리를 파묻고 발만 밖에 드러낸 채 살해당하게 하였다. 이후 마즈다크를 불러 정원을 살펴보라고 하였다. 마즈다크는 추종자들의 시신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카바드는 그의 발을 교수대에 고정한 뒤 처형하도록 하였다.

528년,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간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사산 왕조군은 동로마군을 국경 지대에서 격파한 뒤 다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다라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사탈라 전투에서도 동로마군이 승리했지만, 카바드는 포기하지 않고 531년 다시 군대를 소집하여 친히 시리아로 진격했다. 사산 왕조군은 칼리니쿰 전투에서 벨리사리우스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도시들을 공략하지는 못 했다. 그러던 531년 9월 13일, 아미다 동쪽의 마티로폴리스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카바드는 병에 걸려 죽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카바드는 죽기 직전에 호스로에게 유리한 승계 게획을 마련했다고 한다.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본국으로 돌아간 후 정적들을 처단했다. 그 후 그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개혁을 완수하고 사산 왕조 역사상 최고의 샤한샤로 군림했다.

3. 여담

취미가 목욕이었다고 한다. 당시 페르시아에서는 상당히 이교도적인(혹은 로마적인) 취미로 비난받았던 모양. 그러나 마즈다크교를 밀 정도로 종교에 시니컬했던 카바드 1세는 신경도 안 썼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