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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17:18:27

카타르시스

1. 감정
1.1. 유래1.2. 대중문화1.3. 여담1.4. 관련 문서
2. 칵테일
2.1. 레시피

1. 감정

κάθαρσις / Catharsis[1]

'카타르시스'란 독자 내면에 방치된 채로 썩어가던 상처를 픽션의 비극을 통해 직면하고 비로소 하지 못했던 슬퍼함을 통하여 치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당하는 '비극'에 공감하게 되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주인공을 옹호하며 화를 내면서 자신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정화됨을 느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화를 내고나면 답답한 감정이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나면(또는 비극의 슬픔에 잔뜩 공감을 하고 나면) 자신 내면의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제법 치유되는 걸 느낄 수 있는데,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쾌감이나 희열, 전율 정도로 생각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카타르시스는 쾌감과 희열과는 엄연히 다른 표현이고, 전율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표현이다. 즉, '전율'이라 말해야 할 상황에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면, 그 표현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2]

따라서 '억압받던 주인공이 명백한 악에게 대항하여 통렬한 복수에 성공하는' 사이다 상황은 카타르시스와 관계가 없다.[3] 원래부터 사이다-고구마를 구별하는 단어가 아니며, 역설적이게도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사이다'보다는 '고구마'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통쾌한 복수를 통해 잿빛 과거를 청산하고 장밋빛 미래를 약속받은 주인공은 아니라, 복수에 실패하여 망가지고 상처입고 주저앉은 주인공을 보며 동정심과 연민의 감정이 북받쳐올라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내면의 응어리를 덜어내는 상황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망가짐이 아니라 덜어냄이다. 즉, 통쾌하다는 감정은 아니라, 마음속에 쌓여 있던 답답함을 내보내서 정화된다는 뜻으로 쓰여야 한다. 울분이든 뭐든 분노는 굳이 쾌락 말고 슬픔을 통해도 풀 수 있는 것인데, 어째서인지 쾌락으로 푼다는 측면이 강조된 상태로 여기저기서 사용되다 보니 변질된 것이다.[4] 당장 나무위키만 찾아봐도 카타르시스가 아닌데 카타르시스로 적은 문서가 수두룩하다.[5]

비단 위키뿐 아니라 TV 프로그램 등에서도 관련 전문가 패널이 아니고서는 마구잡이로 사용한다. 포탈사이트에 검색만 해봐도 대부분, 아니 사실 거의 모두가 오용하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미학/심리학 관련 학문의 교수직 내지 석박사학위 소지자이거나 논객 또는 논설위원 수준이 아니면 '카타르시스'란 단어의 뜻을 오남용하는 경우는 몹시 흔하다. 그러나 사용실태에 따라 바뀌는 맞춤법이나 표준어와 달리, '카타르시스'는 엄연히 전문 학술용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뜻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용인될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굳이 오남용에 태클 걸 필요까지는 없으니 제대로 뜻을 아는 사람도 그냥 넘어가는 것일 뿐.

1.1. 유래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며, 쾌적한 장식이 된 언어를 사용하고 각종의 장식은 각각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그리고 비극은 희곡의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

그리스인들은 감정을 어루만져서 위로해주는 것을 '카타르시스'로 칭했는데, 이를 현대적 표현으로 나타내면 영혼을 정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인들이 예술과 관련해서 매우 일찍부터 적용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 문서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 먼저 이를 언급하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정의에서 “카타르시스”를 매우 간결하고도 애매하게 언급한 후 두번 다시 그것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니체는 "(비극의 목적은) 공포와 동정에서 벗어나기 위하거나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위험한 감정에서 자기를 정화시키기 위하기가 아니다.ㅡ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이해했지만ㅡ" 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부정하였다.

다만, 최근에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다른 해석 또한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에 대해 말한 부분은 비극에 대해 말한 부분보다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은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가 "연민과 공포"의 감정에만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우연히 살아남은 텍스트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희극에 대해서도 카타르시스를 사용했는데, 그 부분이 실전되었다는 것. 이렇게 보면 굳이 카타르시스를 정화의 의미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 같은 경우, '어떤 긴장에서 풀려났을 때 느끼는 감정'을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것이라 본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에 근거한 주장일뿐,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해석은 아니다.

1.2. 대중문화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한 주인공들이 많은 주류 이야기들과 달리, 새드 엔딩인 이야기가 많다. 상술한 학술적 정의에 부합하려면 해피 엔딩은 카타르시스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과부적 엔딩이나 열린 결말 또한 이야기를 완전히 매듭짓지 않은 것이라 카타르시스와는 거리가 제법 있다.

새드 엔딩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못 느끼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이 고생고생해서 쌓은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져야 실망이 크고 그만큼 감상자의 절망과 슬픔도 큰 것인데, '흠 그건 좀 안타깝네' 정도로는 그에 못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드 엔딩인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본인의 슬픔을 해소할 정도는 되어야 충분히 카타르시스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슬픔'의 수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엄격한 지표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성과나 공훈이 상당할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에는 허사가 될 것"과 "감상자들이 등장인물에게 깊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 기본적인 전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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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 대중문화의 사례(스포일러 주의) [ 펼치기 · 접기 ]
* 소설 원작의 영화 대부 3부작에서 마이클 콜레오네의 최후
이룰 것을 다 이룬 마피아계 최강 조직의 두목이었으나, 연인들은 물론 외동딸과도 모두 사별하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외로이 죽음을 맞이한다.
* 박성용 작가의 웹툰 아스란영웅전의 결말
* 한국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이우진의 최후와 마지막 설원 장면
이우진은 마지막까지 복수에 성공했으나 본인의 죄책감까진 털지 못한 채 자살하고, 오대수 역시 자신의 죄를 기억상실 혹은 침묵 속에 묻고 털어놓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 한국 영화 왕의 남자의 결말
마지막에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나 정치판의 변화 때문에 최후가 뻔해진 이상,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뜻대로 묘기를 펼치다 죽음을 맞이한다.
* 영웅본색영웅본색 2의 결말
1편에서는 결말에서 동생 송자걸과의 갈등을 풀었지만, 범죄자로서의 과거 때문에 아버지가 죽고 친구도 잃었기에 만족스러운 승리는 아니었다. 2편에서는 더 나아가 동생도 죽고, 친구의 동생과 스승은 빈사지경이라 거의 혼자만 남다시피 했다.

1.3. 여담

1.4. 관련 문서

2. 칵테일

파일:카타칵.jpg

칵테일 중 하나. 괜히 지어진 이름이 아닌 것처럼 상당히 독한 쪽에 속하는 칵테일이다.

맛은 아마레토와 라임즙이 들어가 단맛과 신맛이 약간 나며 아주 독하다. 일단 오버프루프 럼이 들어가 도수가 높은데다 아마레토와 라임즙이 그리 많이 들어가지도 않기 때문에 무척 독하므로 주량이 약한 사람이 막 마시다간 확 갈 수 있으므로 조심하며 마시는 것이 좋다. 도수는 제대로 만들었을 때 51.3°. 파우스트와 비슷한 수준이다.

더블샷으로 두 잔 정도만 마셔도 어지간한 주당들조차 알딸딸해지니 조심히 마시자.

2.1. 레시피

카타르시스 칵테일에 필요한 재료는 다음과 같다.

잔은 일반적인 텀블러를 준비한다. 얼음을 채운 잔에 순서대로 빌드해주면 완성. 보통 3:1:1 비율로 넣지만 도수를 낮추려면 오버프루프 럼을 약간 적게 넣으면 된다. 쉐이킹을 하거나 럼에 잠깐 불을 붙혔다가 제조하기도 한다.


[1] (이단인) 카타리파의 유래인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 '카타로스καθαρὀς = katharos'와도 관계가 있다.[2] 이야기의 관찰자(독자나 청자)는 보통 선한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하려는 보상적 심리의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선善이나 정의正義, 나아가 그것을 대변할 수 있는 성향을 가진 초인超人 캐릭터에 몰입한다. 이 때문에 '비극으로 정화되는 해소감'인 카타르시스 또한 이런 캐릭터의 몰락에서 극대화된다.[3] 김효,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ㅡ비판적 고찰과 한국에서의 수용 문제ㅡ》, 한국연극예술치료학회 학술대회지, 3.0, 한국연극예술치료학회, 2012 참고. 사실 이 밖에도 카타르시스의 정확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학술지나 연구논문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십년 어치로, 굉장히 많다. 다름 아닌 서양철학의 거두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론한 개념이라서...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를 오용하는 일반 독자들과 기자들, 연예인들이 이와 같은 문학/심리학 학술 정보에 관심이 없어서 모를뿐이지, 단어의 정확한 정의 자체는 인문대학 학부 신입생 교양수업에서도 접할 수 있다.[4] 비슷한 예로 '그러니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마태복음 6장 34절) 평안을 추구하라'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로 해석이 갈리는 카르페 디엠이 있다. 사실 앞서 인용한 마태복음 6장 34절도 '내일 걱정은 내일에 하자'와 '내일 걱정은 우리가 아니라 내일이 결정하는 것이니 담대해져라'로 해석이 갈리듯이 고전은 그 특성상 한 가지 의미로 단정하는 건 위험하다.[5] 그냥 쾌감, 통쾌함, 사이다 등으로 적어도 충분한 것을 굳이 카타르시스로 오용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점은 가스라이팅과도 비슷하다. 기존에 있는 단어인 세뇌라고만 표현해도 될 것을 굳이 '가스라이팅'이라는 대중심리학 용어로 바꿔서 적는 사례가 많다.[6] 특히 도원종언추풍오장원.[7] 그것도 사마씨의 통일 먹튀라는 독자들이 가장 싫어했을만한 결말로.[8] 보다시피, 예시에서도 카타르시스를 오용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 최근의 월드컵에서 카타르시스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은 카잔의 기적이다.(승리했음에도 결국 본선 진출에 실패라는 비극으로 끝났기에 이 쪽이 카타르시스에 가깝다.)[9] 기존에는 바카디 151을 사용하는게 메인 레시피였으나 바카디 151이 단종되어 쓸 수 없게 되었다.대용으로 론디아즈 151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