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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7:01:45

카타쿠라 카게츠나

다테 삼걸
카타쿠라 카게츠나 다테 시게자네 오니니와 츠나모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takura_Kagetuna.jpg

片倉景綱
(1557 ~ 1615)

1. 개요2. 생애3.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전국시대의 인물. 다테 가 가신. 시로이시 성주. 초대 카타쿠라 코쥬로. 다테 마사무네를 섬기며 그의 참모로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오키타마 군 나가이쇼의 하치만신사의 신관인 카타쿠라 카게시게의 차남으로 양친이 어렸을 때 사망하여 누나 카타쿠라 키타에게 양육되었으며, 이후 장남이 신관직을 계승받아 친척인 후지타 가문에게 맡겨졌다가 14살 때 다시 누나에게 양육되었다.

다테 가에 평생 충성을 바치며 수많은 공적을 쌓아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통칭 '코쥬로'는 외조부 이이다 코쥬로(飯田小十郎)의 무공을 닮았다고 하여 사용됐지만 카게츠나의 명성으로 대대로 카타쿠라 가의 당주가 이어받고 있다. 카타쿠라 코쥬로는 카타쿠라 가의 긍지이자 시로이시 가의 심볼인 것이다.

1567년에 누나가 다테 마사무네가 태어날 때 마사무네의 유모가 되었으며, 다테 가문의 성인 요네자와에서 큰 불이 날 때 활약하여 9살 때 테루무네가 붙여준 심복이 된다.[1]

그의 썩어가던 오른눈을 도려낸 것도 이 사람으로 그에 따른 일화는 마사무네가 가신들을 불러모아 병으로 곪아가는 오른눈을 도려내라고 시켰다.
하지만 가신들은 우물쭈물했고 그 틈에 카게츠나가 달려들어 그의 오른눈을 도려내었는데, 그러자 고통과 쇼크로 마사무네는 기절했고 거기에 카게츠나가 "주군이 될 사람이 이 정도 일을 가신에게 시키는가!"라며 그를 꾸짖었다. 또는 눈 때문에 침울하게 있던 본텐마루(마사무네의 아명)를 안아주는 척하면서 그의 눈을 도려냈다는 설도 있으며, 이후 그 일로 할복을 하려 했지만 본텐마루가 막으면서 "부동명왕이 카게츠나에게 붙어 본텐을 다시 살렸다!"라고 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많다.

이후 엔도 모토노부의 추천으로 1575년에 마사무네의 근시가 되어 군사로 중용받았으며, 1585년의 히토토리바시 전투, 1588년의 고오리야마 전투, 1589년의 스리아게하라 전투, 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카게츠나는 마사무네가 당주가 되자마자 군사적인 작전과 군략, 외교 면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했다.
마사무네가 습봉하고 히바라 공격이 시작됐는데 내응공작을 만들라는 조언을 했고 그대로 실행해 적을 유인하고 습격해 단번에 적을 토벌하고 히바라를 장악했다. 히토토리바시 전투에서는 열세인데다 절체절명으로 적에게 몰리자 "내가 마사무네다!!"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589년 아시나 영토 침공에서는 생각지 못하게 유리하게 날씨 상태가 바뀌어 우왕좌왕하는 틈에 텟포를 쏴 구경꾼들이 놀라 달아나게 했고 그걸 본 아시나는 아군이 패주했다 생각해 진형이 무너져버리고 그걸 이용해 공격하여 승리했다. 오다와라 참전 때 위기도 다테를 설득해 히데요시에게 보낸 것도 이후의 여러가지 연출로 위기를 벗어나게 한 것도 카게츠나라고 한다.
병사하기 전에도 오오사카 전투에 대해 조언을 하였고 아들 시게나가를 선봉에 서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말대로 실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에게 50만 석을 줄테니 자기 밑에 붙으라며 그를 포섭하려고 했지만 카게츠나는 마사무네가 어릴 때부터 섬긴 자라 감히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 일로 주군이 무시당한 것 같아 분노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어느 날 카게츠나를 만났을 때 "새 없는 섬의 박쥐가 왔네." 하고 비꼬았더니[2] 카게츠나가 곧 "친치쿠린노린린(ちんちくりんのりんりん).[3]"하고 되받아쳤다. 그 말을 듣고 무지한 마사노리는 뜻을 알 수 없어 매우 분해했다고 한다. 그 일을 들은 마사무네는 감탄했고 위산과다로 쓰린 속이 나아졌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확정되었을 때 히데요시가 오다와라를 정벌한다고 관동의 제대명에게 참가할 것을 명했는데, 이 때 가오를 부리던 다테 마사무네를 설득해서 보냈다. 성주 대신 성을 지키는 죠다이로 아다치 군 니혼마츠의 재번, 시노부 군 오모리 성의 성주가 되었다가 농민반란을 사주했다는 혐의로 오슈가 징계를 받은 후에는 사누마 성의 성주, 와타리 성의 성주 등을 맡았으며, 외교 교섭에서 중개를 담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1602년에 시로이시 성의 1만 3천 석의 영주가 되었으며, 1614년에는 병으로 누워있다가 1615년에 병사한다.[4]

피리의 명인이었다고 하며 군영 사이에서 시오카제(潮風)라는 명품 피리를 불렀다하는 일화가 있다.

가끔 욱하는 성질이 있는 마사무네를 잘 보필해서 '지'의 면에서 마사무네를 도왔다.[5] 모에화 설정 중에 위통에 시달린다는 설정이 많이 붙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카게츠나의 아내가 임신했을 때 아직 주군인 마사무네는 후사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태어나면 바로 죽이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마사무네가 서찰을 보내 급히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고, 그 때 살아남은 아이가 후일 가문을 이은 카타쿠라 시게나가다.

참고로 다테 삼걸 중 유일하게 다테 마사무네와 큰 마찰 없이 신임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다른 두 명은 다테 가문에서 추방당했다가 복귀했다. 마사무네 가문은 히데요시의 영토 삭감 당시 엄청난 트러블을 겪고 유명 가신들이 대부분 영지 획정 관련한 분쟁이나 히데요시와의 연계를 의심한 마사무네와의 갈등 때문에 가문을 뛰쳐나갔다가 후일에서야 복귀하는 등의 일대 소동이 벌어져 내정에 큰 차질을 빚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신임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의심 없는 끈끈한 주종관계로 맺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3. 대중 매체에서

3.1.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片倉小十郎.jpg 파일:片倉小十郎4.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ny_katakurakagetsuna01_shinsei.jpg
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파일:GbMRbpqakAIfj4Y.jpg
노부나가의 야망 출진

노부나가의 야망에선 A급 만능형 무장이다.

3.2. 전국무쌍 시리즈

카타쿠라 코쥬로(전국무쌍) 참조.


[1] 누나인 오키타가 추천했다는 설이나 그 외의 설은 많지만 확실한 건 없다.[2] 이 이야기의 원조는 오다 노부나가쵸소카베 모토치카를 빗대어 한 말이다. 즉 호랑이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노릇 한다고, 별다른 호적수가 없었기에 모토치카가 시코쿠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비꼬는 의미. 다테도 시골 사람들이라고 비웃는 것으로, 마사무네는 문화적 소양이 깊었음에도 시회에서 그럴싸한 시짓기 솜씨를 선보이자 "궁벽진 곳의(鄙の) 가인"이라며 조롱 섞인 칭찬을 듣기도 했다.[3] 친치쿠린은 '땅딸보'라는 뜻으로 이는 히데요시를 칭하는 말이고, 린린은 원숭이방울을 의미한다. 즉 "넌 히데요시 꼬붕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4] 중풍으로 추정된다.[5] '무'는 사촌인 다테 시게자네. 여기에 오니니와 츠나모토를 더해 '다테 삼걸'이라고도 하며, 이와는 별도로 다테 시게자네와 카타쿠라 카게츠나를 함께 묶어 '다테의 쌍벽'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