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07 21:38:39

SUPER EIGHT/역사

칸쟈니∞/역사에서 넘어옴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SUPER EIGHT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SUPER EIGHT의 라이브 연혁표에 대한 내용은 SUPER EIGHT 문서
4.2번 문단을
부분을
, 음반에 대한 내용은 SUPER EIGHT/음반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레귤러 멤버에 대한 내용은 SUPER EIGHT/레귤러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목록
2.1. 데뷔 전2.2. 2004년~2006년2.3. 2007년~2010년2.4. 2011년~2013년2.5. 2014년~2017년2.6. 2018년~

1. 개요

일본 아이돌 그룹 SUPER EIGHT의 히스토리를 정리한 문서.

2. 목록

2.1. 데뷔 전

오사카로 돌아간 시기를 고생했던 시대라고 말한다면 그거야 그렇겠지만,
고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챌린지였네요.
그러니까 엄청 즐거웠어요.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들 뿐이었고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 뿐이었지만
「언젠간 절대로, 을 이룰거야」라고 에너지가 가장 흘렀네요.
《Myojo》 2012년 4월호 무라카미의 말

일찍이 쟈니스 황금기의 멤버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요코야마 유, 시부타니 스바루, 무라카미 싱고, 니시키도 료. 그러나 황금기의 주요 멤버인 아라시타키&츠바사의 데뷔 즈음부터 급격하게 도쿄의 일이 줄면서 각자의 사정과 고민을 가진채 오사카로 내려와야했다.

한편, 당시 엠스테에 단독으로 출연하는 등 칸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마루야마 류헤이, 야스다 쇼타, 우치 히로키의 칸사이 주니어 유닛 V.West도 점차 일이 줄어들며 일부 유닛 멤버가 떠나게 되었고[1] 자신들의 운명을 걱정하게 된다.

그리고 2002년,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멤버들은 부타이 ANOTHER의 기회를 얻는다. 쟈니 키타가와는 이 것에 대해 마지막 찬스라고 이야기 하였다. 멤버 모두들 이 무대를 성공시키지 못 하면 다음은 없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공연 초반엔 관객들이 전혀 들어 오지 않았다. 2층, 3층은 물론 1층조차 다 차지 않았던 것. 그러나, 멤버들 모두 실망감을 감추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부터 노력해나갔다. 어떻게 하면 공연에 와줄까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런 멤버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공연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차 관객도 많아져 3년째가 되던 해에는 드디어 매진도 하게 되었다.

ANOTHER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쟈니 키타가와로부터 드럼의 멤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마루야마, 야스다가 리듬감이 좋은 오쿠라 타다요시를 추천한다. 한 달 뒤 리허설까지 완벽하게 연습해오는 것을 전제로 만약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면 야스다에게도 책임을 묻겠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야스다는 이 때, 오쿠라를 믿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각오는 해두었다고 한다.

2002년 12월, 오쿠라를 제외한 7명의 멤버가 레귤러로 출연 중이던 J3KANSAI에 마지막 멤버로 오쿠라가 합류하면서 칸쟈니8가 결성 된다.

그러던 도중 니시키도, 우치가 NEWS의 멤버로 발탁된다. 데뷔가 결정된 멤버들도 오사카에 남게 된 멤버들도 에이또에 대해서 모두들 어떻게 되는걸까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다들 「열심히 하고 와!」라고 배웅해주거나 했었네요.
속으로는 절대로 복잡했을텐데 말이에요.
하지만, 그게 있었기 때문에 NEWS도 칸쟈니 에이또도 모두 열심히 하자 라고 생각했어요.
《Myojo》 2011년 12월호 니시키도의 말
어떤 것이 저희를 지탱하고 있었냐고 한다면
니시키도가 이쪽으로 돌아왔을 때 즐거운듯이 있어줬던 거에요. 그래서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칸쟈니 에이또야」라는 분위기가 엄청 있었으니까요. 그게 엄청 지탱해주었어요.
《Myojo》 2012년 3월호 요코야마의 말

열심히만 한다면 자신들도 데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2.2. 2004년~2006년

데뷔라는 최초의 목표와 꿈을 드디어 이룬 해.
그러나 데뷔 곡은 지금까지 불러본 적 없는 엔카라는 새로운 장르.
새로운 것 투성이의 일에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갔다.
2012년 칸쟈니∞ 핫사이 팜플렛 《Dear. Eighter》 중 오쿠라의 말
파일:1vxrA1f.gif

칸사이 주니어 출신의 첫 데뷔 그룹[2][3]

도쿄에서 일을 하고 오사카로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시부타니가 구입한 스포츠 신문을 보고 멤버들이 데뷔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뿐만 아니라 마루야마도 교토에서 오사카로 일하러 오는 길에 옆에 앉은 아저씨의 스포츠 신문을 통해 자신의 데뷔를 알게 되었다. 칸사이에 머물고 있었던 오쿠라의 경우에는 데뷔한다는 이야기를 직접 듣지 못한채 모호한 상태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데뷔를 하며 이름 표기가 칸쟈니8에서 칸쟈니∞로 변경된다. 데뷔 싱글인 나니와이로하부시는 장르 분류가 엔카. 우리나라로 치면 아이돌이 트로트로 데뷔한 셈이다.

멤버들 모두 처음에는 데뷔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엔카라는 새로운 장르도 우리들만의 무기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쟈니스 그룹의 호화로운 데뷔 기자회견과는 달리 칸쟈니∞의 데뷔회견은 소속 음반사 옥상에서 무대의상 입고 뒤에 자기 이름이 써진 깃발 하나 세워놓은채 썰렁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데뷔때부터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칸쟈니∞의 좋은 네타거리. 바람이 매우 세게 불고 있는 영상을 보면 보는 이도 덩달아 추워진다. 거기다 어쩐 일인지 데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반에는 사무소에게 완전히 방치 당했고 푸시도 받지 못했다. 어느 정도냐면, 사무소에서 일거리를 주면 팬들이 겁먹으며 반문했다. '우리한테 왜 이래?'. 아래는 멤버들이 방송에서 언급한 안 좋은 대우의 예.[4]
싱글 발매가 단발성 기획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음반 매장, 방송국 등 홍보를 위해 멤버들이 직접 뛰어 다니기도 했다. 데뷔를 오랫동안 기다린 팬들도 함께 힘을 모아 결국 칸사이 한정 발매임에도 불구하고 오리콘 차트 엔카 부분 1위로 첫 등장. 결국 이러한 노력이 전국 발매의 원동력이 되었다.

방송 스태프들에게 쟈니스인데도 이렇게 NG 없는 그룹은 처음이라고 듣기도 했다.[5] 하지만 방치당한 덕분에 이런저런 제약을 받지 않고 더 다양한 일들을 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다른 일 없이 부타이, 콘서트 등의 공연이 많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멤버의 말처럼 인지도는 낮지만 관객 동원수만큼은 높았다.

2.3. 2007년~2010년

파일:KJNW-47.png

5개월에 걸친 47도도부현 전국 투어와 《즛코케 오토코미치》로 처음 사람들에게 인식되며 전국적 인지도와 멤버들의 개인 활동이 점차 늘어간 시기

칸쟈니∞의 대표사골곡인 즛코케 오토코미치가 발표 된다. 지금까지도 멤버들이 뽑는 자신들의 전환점이 된 곡. 후에 발표되는 무세키닌히어로와 함께 그룹 기준 가장 유명한 곡이다.

47도도부현 콘서트는 맨 처음엔 규모가 작았지만 이왕 하는 김에 전국을 다 돌자는 멤버의 말에 실현된 투어이다. 전국 47곳을 도는건 상상보다 더 힘들었지만 그만큼 소중한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도쿄 돔부터 시골 시민회관까지 공연장의 규모는 제각각이었으나 어떤 곳에서도 최선을 다해 무대를 선보였다. 이 투어를 수록한 DVD 47은 2008년 연간 음악 DVD 랭킹 1위를 차지하였다.

이런 멤버들의 노력과 결과에도 오랫동안 싱글 릴리즈의 소식이 없어 팬도 멤버들도 답답해했다. 또, 애석하게도 2008년 투어는 DVD화 되지 못했다.

2009년 PUZZLE 투어 중에는 다툼혹은 대화도 있었다. 일명 나가노의 밤. 한동안 그룹 내 이상한 분위기가 돌았는데[6] 그 날은 결국 니시키도가 폭발해 요코야마에게 말을 걸었고, 멤버 모두가 마음에 있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날을 계기로 그룹에 대해 각자 조금 다른 방향으로 향했던 마음이 다시 같은 방향이 되었다. 요코야마에 의하면 데뷔를 앞두고 싸웠던 그 때와 같은 뜨거운 느낌이었다고. 다시 한번 그룹으로 단결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이 시기부터 콘서트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는 것 뿐만 아니라[7] 사무소와 레코드 회사의 사람들과 버라이어티, CD릴리즈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드디어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외 멤버들의 렌도라, 부타이, 버라이어티의 기회도 늘어 솔로 활동에도 충실했던 시기이다. 당시 멤버들이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말한 것은 「솔로 활동에서 배운 것을 그룹으로 가져가자.」 이 마음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2.4. 2011년~2013년

그러니까 가장 강한 건
이래저래 굴러보면 방어법을 터득하게 되는 거에요.
그걸 터득한 칸쟈니는 역시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돈이 없던 시절도 모두 겪은 아이돌은 잘 없는데
그걸 전부 공유하고 동료의식이 생기고 지금 이렇게 나온다는 건
앞으로가 칸쟈니의 역습인거죠.
굉장히 강한 아이돌이 나온다고 할까.
120420 A-Studio 쇼후쿠테 츠루베의 말[번역출처]
파일:KJNW-8est.gif

8주년을 전후로 그룹으로도 개인으로도 엄청난 급성장기에 들어간다. 2012년에는 가수들에게 있어 꿈의 무대인 홍백가합전에 첫 출장하였다.

2.5. 2014년~2017년

새로운 레이블을 세울 수 있게 해주신 것으로
스스로를 다시 되돌아보고 더 위를 목표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과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쌓아 가고 싶습니다.
2014년 인피니티 레코드 설립 코멘트 중 야스다의 말
파일:KJNW-jussai.gif

10주년을 끝으로 테이치쿠와 결별하고 자주 레이블을 세웠다.

인피니티 레코드에 대한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칸쟈니∞ 문서
3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15년에는 다양한 음악 지식과 멤버들의 세션 무대를 볼 수 있는 칸잼 완전연SHOW와 갑작스런 피구, 영어회화 전달 게임으로 잘 알려진 칸쟈니∞크로니클의 새로운 레귤러 방송들이 시작되기도 했다.

또, 오랜만에 작은 홀에서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의 콘서트를 개최. 보통의 콘서트와는 다르게 버라이어티 요소가 강하고 지역과의 유대가 돋보였던 공연이다.
파일:KJNW-metrock.gif}}} ||

2.6. 2018년~

IF SOMETHING SAD HAPPENS TO YOU,
WE'LL MAKE YOU FORGET IT WITH OUR ROCK!!

KANJANI∞
TOUR 2018
2018년 칸쟈니's 에이터테인먼트 GR8EST, Goods

RE DEBUT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61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61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1] 먼저 이마야마 토오루가 퇴소. 2002년 ANOTHER의 부타이가 끝난 뒤, 미즈노 키요히토도 퇴소하게 된다.[2] 죠시마 시게루, KinKi Kids, 오카다 준이치 등 칸사이 출신의 선배는 존재하지만 칸사이 주니어 출신은 칸쟈니∞가 최초이다.[3] 참고로 칸쟈니∞ 데뷔로 부터 10년이 지난 2014년이 되어서야 칸사이 주니어 출신의 두번째 그룹인 쟈니즈WEST가 데뷔한다.[4] 120726 TOKIO의 레귤러 방송 5LDK 요코야마, 무라카미 방영분.[5] 사무소에게서 이런저런 행동들을 제약받는 것. 예를 들어 야한농담. 보통 아이돌이라면 NG가 많기 마련이다.[6] 야스다에 따르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싸우지도 않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아니였다.[7] 쇼치쿠좌 시절부터 라이브에 대해서는 이미 멤버들이 관여하는 부분이 많았다.[8] 이 시기 쟈니벤을 보면 멤버가 절반이 없다.[9] 오쿠라의 경우 처음 간이 검사에서는 음성 판정을 받았었다.[번역출처] 네이버 카페 팔방미남 with 칸쟈니에이또[11] 윷놀이와 비슷한 일본 실내 놀이[12] 햐다인이 칸쟈니에이또에게 준 또다른 노래인 미소지소년도 햐다인 특유의 유쾌함과 약을 빤 무대가 돋보인다. 무대 위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두명이서 말 다툼을 하기도 한다.[13]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라디오 방송인데 몬스터 헌터 티셔츠도 입었다.[14] 기간: 11월 7일부터 다음 해 6월 27일까지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