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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00:44:09

칼루샤 브왈랴

잠비아의 축구인
파일:kalusha-bwalya.webp
이름 칼루샤 브왈랴
Kalusha Bwalya
출생 1963년 8월 16일
북로디지아 무풀리라
국적
[[잠비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축구행정가
소속 선수 무풀리라 블랙풀 FC (1979~1980)
무풀리라 원더러스 FC (1980~1985)
세르클러 브뤼허 KSV (1985~1989)
PSV 에인트호번 (1989~1994)
클루브 아메리카 (1994~1997)
클루브 네카사 (1997)
알 와흐다 FC (1998)
클루브 레온 (1998)
CD 이라푸아토 (1999)
CD 베라크루스 (1999)
CF 코레카미노스 UAT (2000)
감독 잠비아 대표팀 (2003~2006)
기타 잠비아 축구 협회 (2008~2016 / 회장)
국가대표 87경기 39골 (잠비아 / 1983~2004)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은퇴 이후
3.1. 감독 경력3.2. 행정가 경력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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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잠비아의 전 축구선수이자 축구감독, 행정가. 2016년까지 잠비아 축구 협회장을 역임했다.

현역시절 잠비아 축구를 대표하는 잠비아의 축구 영웅이었으며,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특출난 활약을 보였던 공격수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79년 자국의 작은 클럽 무플리라 블랙풀 FC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한 그는, 이듬해 바로 같은 연고지의 더 큰 클럽인 무풀리라 원더러스 FC로 이적해 잠비아 리그에서 주목받는 선수가 된다. 당시 팀은 잠비아 리그에서 정점을 찍고 내려와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왈랴만큼은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1984년 팀의 컵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일약 유럽 리그의 주목을 받게 된다.

아프리카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리그 중 하나인 벨기에 리그에서 영입제안이 오기 시작했고, 1985년 세르클러 브뤼허 KSV에 입단하면서 유럽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1985-86 시즌부터 팀에 합류하자마자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하며 서포터가 뽑은 올해의 세르클러 브뤼허 선수로 뽑히는 등 빠르게 유럽무대에 적응했고, 벨기에 리그에서 3시즌동안 95경기 30골을 기록했다. 이러한 임팩트 있는 활약에 당시 유럽 챔피언을 지냈던 PSV 에인트호번이 관심을 보였고, 1989년 브왈랴는 네덜란드로 무대를 옮긴다.

당시 에인트호번에는 호마리우, 에릭 헤러츠, 한스 판브뢰켈런 등 스타선수들이 즐비했고, 감독도 잉글랜드의 명장 바비 롭슨이었던 지금보다 훨씬 더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브왈랴는 이 시기를 회고하며 훈련, 생활 등 모든 경험들이 다 자신에게 발전을 가져다줬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확고한 주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브왈랴는 이 스쿼드 내에서 로테이션급 공격수를 보며 5시즌동안 101경기 25골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남겼다.

1994년 그는 유럽을 떠나 멕시코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멕시코 리가 MX의 강호 클루브 아메리카에 입단하며 북미 리그에서 보기 드문 아프리카 선수가 되었고, 1997년까지 3시즌동안 88경기 21골을 넣으며 여전한 활약을 보였다. 이 시기가 가장 축구하면서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브왈랴는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1998년 중간에 잠시 아랍에미리트 리그에서 뛴 시기를 제외하면 클루브 네카사, 클루브 레온, CD 이라푸아토, CD 베라크루스 등 멕시코 리그에서 여러 팀으로 옮겨다니며 뛰었고, 2000년 멕시코 하부리그 팀 코레카미노스에서 13경기 5골을 기록하고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A매치 통산 87경기 39골을 기록하며 1990년대 짧은 잠비아 축구의 전성기의 핵심 역할을 했다.[1]

1983년 수단과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했고, 1984년 우간다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것이 바로 1988 서울 올림픽 축구였다. 당시 잠비아는 올림픽 본선에 깜짝 진출한 다크호스로, 본선 진출 자체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그만 조별리그 첫 경기 이탈리아전에서 4-0 대승이라는 충격적인 퍼포먼스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브왈랴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승리의 1등공신이 되고, 잠비아는 대회 8강에 진출하며 호성적을 기록한다. 이 활약상으로 그는 1988년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한다.

이후 A대표팀으로 본격적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1990년대 초 급성장을 한 잠비아 대표팀의 주장이자 핵심 선수로 아프리카 내에서 맹위를 떨치게 된다. 당시 고드프리 치탈루 감독이 이끄는 잠비아 대표팀은 화끈한 공격축구로 치폴로폴로(Chipolopolo / 구리탄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994 FIFA 월드컵 미국 대회 지역예선에서 강력한 모습으로 최종예선에 진출한 상태였고, 본선 진출 또한 유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3년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공기 참사가 일어나며 당시 이동하던 선수단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 강력했던 대표팀은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당시 브왈랴는 천만 다행으로 네덜란드에서 따로 경기 장소인 세네갈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자연스레 혼자만 남은 대표팀 멤버로는 정상적인 경쟁 자체가 불가능했고, 결국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 참사 이후에 브왈랴는 초인적인 멘탈로 대표팀을 이끌며 199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준우승이라는 기적적인 성과를 일궈낸다. 1996년 남아공 대회에서도 브왈랴는 대회 득점왕을 수상하면서 팀을 3위에 올려놓는 투혼을 보인다. 하지만 이 시기 잠비아 축구는 브왈랴 원맨팀으로 운영되던 한계가 있었고, 무려 그가 프로생활을 접은지 4년이나 된 2004년까지도 그는 대표팀의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국가대표 경력을 이어갔다. 41세에 나이에 출전한 2004년 라이베리아와의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회 지역예선에서 강력한 프리킥 골을 기록하는 등 놀라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3. 은퇴 이후

3.1. 감독 경력

2003년부터 그는 잠비아 대표팀의 선수 겸 감독으로 대표팀을 이끌며 감독 업무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했고, 이후 2006년 1월에 열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도 조별리그에서 패퇴하며 그는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3.2. 행정가 경력

잠비아 대표팀 감독직 사임 이후, 그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테크니컬 스터디 그룹의 멤버로 참여했고, 이후 2008년 잠비아 축구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CAF의 상임 고문으로도 선출되어 활동했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의 앰배서더로도 활동했다. 잠비아 축구협회장으로서의 가장 큰 업적이 바로 에르베 르나르 감독을 선임해 잠비아 대표팀의 부활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르나르 감독은 201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우승을 이끌며 잠비아의 숙원을 풀었다.

잠비아 축구협회장으로서 2012년 재선된 이후 2016년 3선에 도전했으나 잠비아의 사업가 출신 축구행정가인 앤드류 카망가에게 밀려 낙선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2018년 그는 FIFA 윤리위원회에서 뇌물 수수 혐의로 국제 축구 무대에서의 2년간 활동 정지 징계를 받게되는데,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유치전에서 AFC 회장인 모하메드 빈 함맘에게 뇌물성 선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의 선수시절 명성을 깎아먹는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4. 여담


[1] 왜 짧은 전성기였냐면 바로 후술할 항공기 참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