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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7 23:33:14

크레이그 벨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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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EFA BEL.png 뱅상 콤파니 · 파일:UEFA WAL.png 크레이그 벨라미
* 본 문서는 간략화한 것입니다. 스쿼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 주세요.
* 본래 스쿼드에서 타 구단으로 임대 간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크레이그 벨라미의 역임 직책
{{{#!folding ▼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라이언 긱스
(2005~2007)
크레이그 벨라미
(2007~2010)
아론 램지
(2011~2012)
}}} ||
Burnley Football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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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fd2f4> 이름 크레이그 벨라미
Craig Bellamy
본명 크레이그 더글라스 벨라미
Craig Douglas Bellamy
출생 1979년 7월 13일 ([age(1979-07-13)]세)
웨일스 카디프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웨일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69cm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 / 은퇴)
소속 <colbgcolor=#8fd2f4> 선수 브리스톨 로버스 FC (1988~1990 / 유스)
노리치 시티 FC (1990~1996 / 유스)
노리치 시티 FC (1996~2000)
코번트리 시티 FC (2000~2001)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1~2005)
셀틱 FC (2005 / 임대)
블랙번 로버스 FC (2005~2006)
리버풀 FC (2006~2007)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2007~2009)
맨체스터 시티 FC (2009~2011)
카디프 시티 FC (2010~2011 / 임대)
리버풀 FC (2011~2012)
카디프 시티 FC (2012~2014)
감독 RSC 안데를레흐트 U-21 (2019~2021)
RSC 안데를레흐트 (2021 / 수석 코치)
번리 FC (2022~ / 수석 코치)
국가대표 파일: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78경기 19골[1] (웨일스 / 2002~2010)
파일:영국 올림픽 대표팀 엠블럼.svg 5경기 1골 (영국 올림픽 / 2012)


[clearfix]

1. 개요

웨일스의 前 축구 선수이다.

2. 플레이스타일

그는 빠른 주력과 강력한 슈팅,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끈기, 그리고 기회를 포착하여 침투하는 능력을 발판으로 삼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자신의 진가를 오랫동안 보여줬다. 하지만 성격이 거칠어 경기에서 종종 불필요한 행동으로 상대팀 선수들과 마찰을 빚고 징계를 받기 일쑤였고 소속팀에서 불화를 일으키곤 해서 능력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 편이다. 언론이 드세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활동하다보니 그런 면이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가 웨일스 출신으로서 프리미어리그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 클럽 경력

3.1. 노리치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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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6월 13일 웨일스의 카디프에서 태어나 9살 때부터 브리스톨 로버스의 유스팀에 소속되었고 그곳에서 2년간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러다가 노리치 시티의 유스팀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6년간 활동하다가 1997년 3월 15일 18살의 나이에 1군에 데뷔했다. 당시 그가 데뷔한 경기는 2부 리그 팀인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리그 경기였는데, 그는 추가 시간에 투입되어 자신의 진가를 채 보여주지 못했다. 이후 그는 잔여 시즌 동안 단 2번 밖에 뛰지 못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에 뛰어든 시기는 1997-98 시즌이었다. 그는 1997년 8월 12일에 바렛과의 경기에 첫 선발 출장한 뒤 36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하며 팀의 주전 공격수로 거듭났다. 이후 벨라미는 1998년 8월 22일 QPR과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4:2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1998년 12월, 벨라미는 울버햄튼 원더러스의 수비수 케빈 머스캣에게 깊은 태클을 당해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었고 결국 2달 동안 경기에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1999년 여름에는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999-00 시즌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후 벨라미는 2000년 4월 22일에 복귀전을 치뤘고 4경기 2골을 기록했다. 노리치 보드진은 그에게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2000년 여름에 그를 코벤트리 시티로 이적시켰다.

3.2. 코번트리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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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16일, 벨라미는 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코벤트리 시티로 이적했다. 600만 파운드는 코벤트리 클럽 역사상 최고 이적료였다. 그는 12월 초까지 3골밖에 넣지 못해[2] 코벤트리 역사상 최악의 먹튀가 되는 듯했다. 그러던 2000년 12월 10일, 그는 레스터 시티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그의 경기력은 한결 좋아져 리그 34경기 동안 6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코벤트리는 2000-01 시즌 강등당했다. 시즌이 끝난 뒤, 그는 코벤트리 팬들로부터 먹튀라는 비난을 받은 채 쫓겨나듯 팀을 떠나야 했다. 훗날, 벨라미는 "나는 코벤트리에서 한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매우 의기소침했고 내 경력이 후퇴했다고 느꼈다."라고 밝혔다.

3.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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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뉴캐슬에서 데뷔전을 치르고 있는 벨라미

벨라미는 2001년 6월 6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뉴캐슬로 이적했다. 당시 뉴캐슬의 감독이었던 바비 롭슨은 회고록에서 그를 "위대한 재능이 다루기 어렵고 변덕스러운 성격에 갇혀 있었다"라고 묘사했다. 그는 2001년 8월 28일 뉴캐슬의 앙숙인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1:1 무승부에 기여했다. 이후 그는 팀의 주전 공격수가 되어 훌륭한 경기력을 펼쳐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벨라미는 아스날과의 경기를 3:1로 이기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퇴장을 당함으로서 그의 성질머리를 처음으로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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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시어러와 벨라미

바비 롭슨은 벨라미를 앨런 시어러와 짝지어주고 투톱으로서 팀의 공격을 이끌게 했다. 벨라미는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2001-02 시즌 리그 27경기 9골, 리그 컵 3경기 4골, 대륙 대회 6경기 1골을 기록하며 총합 39경기 14골을 거두었다. 그는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EPL 올해의 영 플레이어상'을 수여받았다. 이후 벨라미는 2002년 11월 13일 페예노르트와의 UEFA 조별 예선 경기에서 2골을 몰아치며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뉴캐슬은 벨라미의 활약을 앞세워 32강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벨라미는 인터 밀란과의 경기에서 마르코 마테라치를(?!!)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퇴장을 당했고 3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아야 했다.

벨라미는 2003-04 시즌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그의 성질머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2004년 3월 뉴캐슬의 1군 코치로 근무하고 있던 존 카버에게 의자를 집어던지는 바람에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뉴캐슬은 레알 마요르카와의 유로파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벨라미가 마요르카로 가기를 거부했고 이에 대해 카버가 꾸짖자 격분한 나머지 의자를 던져버린 것이다. 바비 롭슨은 이 사건에 대해 보드진과 장기간 논의한 후 그를 처벌하기 보다는 말로 설득시키기로 했다. 벨라미는 이에 대해 롭슨의 선수 관리 능력을 칭송했다.

2004년 8월 고령의 나이 때문에 선수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바비 롭슨이 갑작스럽게 경질된 후, 벨라미는 그를 잘못 파악한 그레이엄 수네스에 의해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에서 뛰는 악재를 맞이했다. 수네스는 발이 빠르다는 이유로 스트라이커로 잘 하고 있던 벨라미를 윙어로 변경시켜서 억지로 기용하는 우를 범했고 벨라미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4년 10월 말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추가 시간에 골을 기록하며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냈지만, 수네스는 2005년 1월 23일 아스날과의 경기에 그를 데려오지 않겠다고 밝혔다.

수네스는 벨라미가 햄스트링 문제로 경기에 나올 수 없었다고 밝혔지만, 경기를 치른 직후 인터뷰에선 벨라미가 우측 윙어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기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벨라미는 클럽이 원한다면 어느 포지션에서나 뛸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아스날과의 경기 전에 부상당했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시인했고 이로인해 수네스는 졸지에 팬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어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이에 격노한 수네스는 자신이 뉴캐슬 감독으로 있는 한 벨라미가 뉴캐슬 유니폼을 입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2주 주급 정지 징계를 내렸다.

2005년 1월 말, 벨라미는 셀틱으로 임대되었다. 이후 그는 2004-05 시즌의 후반기 동안 셀틱에서 활동하며 15경기 9골을 기록했고 스코틀랜드 컵 우승을 차지하며 데뷔 이래 처음으로 대회 우승 경력을 기록했다. 그러던 2005년 4월, 뉴캐슬이 FA컵 준결승전에서 맨유에게 패하자, 벨라미는 뉴캐슬의 주장 앨런 시어러에게 조롱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시어러는 그가 뉴캐슬로 돌아온다면 '강냉이를 털어버리겠다(knock his block off)'는 발언을 했다. 이후 벨라미는 블랙번으로 이적했다.

3.4. 블랙번 로버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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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8일, 벨라미는 블랙번과 4년 계약을 체결했다.[3] 그는 2005-06 시즌에 17골을 기록하여 팀내 최고 공격수로 자리매김했고 블랙번은 그의 활약을 앞세워 순위를 6위로 끌어올려 유로파 대회에 진출했다. 팬들은 그의 활약에 감격하여 블랙번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다. 이에 리버풀과 아스날 등이 그를 영입하려 했는데, 그는 리버풀을 택하여 한 시즌만에 블랙번을 떠났다.

3.5. 리버풀 FC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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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0일, 벨라미는 6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리버풀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에 휩싸였다. 그후 7월 1일에 리버풀로 합류하면서 소문은 사실임이 드러났다. 그는 리버풀로 이적한 후 전 소속팀이었던 뉴캐슬을 비난했다. 2006년 9월 뉴캐슬의 글렌 로더 감독이 리버풀에게 2:0으로 패한 후 "벨라미는 어디에 있던 문제를 일으킨다. 이제 리버풀에서도 또 일을 내려고 한다." 고 비난하자, 벨라미는 "뉴캐슬은 항상 무언가를 만든다.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뉴캐슬은 내가 몸 담고 있는 리버풀을 상대로 고전했다. 나는 언제나 리버풀에서 뛰길 원했고, 이런 것이 뉴캐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뉴캐슬의 몇몇이 내가 실패하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블랙번으로 보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 당시 일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라며 맞대응했다.

그러나 벨라미는 리버풀에서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는 2006년 9월 9일 마카비 하이파 FC와의 챔피언스리그 3차전에서 득점을 했지만, 리그에선 10월 중순까지 골을 넣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6년 12월 2일, 벨라미는 위건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2골과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4:0 대승을 이끌어냈다. 그는 2주 후 찰튼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다시 한 번 골을 기록했고 2006년 12월 23일과 2007년 1월 13일에 왓포드와의 홈, 원정 경기 모두 골을 기록하며 리버풀을 7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2007년 1월, 벨라미는 욘 아르네 리세를 골프채로 폭행했다는 루머에 휩쓸렸다. 당시 리버풀은 FA컵에서 조기 탈락한 뒤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을 앞두고 포르투갈에서 짧은 휴가 겸 전지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식을 취하던 와중에 벨라미가 리세더러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했는데 리세가 거부하자 격분하여 그를 골프채로 폭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골키퍼 예지 두덱과 스트라이커 로비 파울러 등도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다고 한다. 이에 베니테즈는 선수들에게 15만 파운드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리세를 폭행했다는 언론의 보도는 오보였다. 벨라미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날의 진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날 밤 나는 호텔에서 룸메이트 스티브 피넌을 포함해서 사미 하피아, 리세와 함께 있었다. 나는 리세에게 노래를 하라고 강요했다. 나는 이 말을 두 서번 정도 말한 것 같다. 리세는 노래를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또다시 노래하라고 말했고 리세는 나에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내 요구가 매우 언짢았던 모양이다. 그는 일어나서 나에게 소리쳤다.
"똑바로 들어. 나는 노래를 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나한테 노래하라는 말 도저히 못들어주겠어."
사미는 나에게 그를 무시하라고 말했다. 리세는 때맞춰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날 밤 너무 화가 나 밖에서 술이나 더 마셨다. 그런데 늘 그랬듯이 나는 도저히 내 감정을 추스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내 동료들 앞에서 나에게 수치심을 주면,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술 마실 때면 개가 되는 스타일이었고 나도 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난 피넌에게 우리는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리세랑 끝장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피넌과 나의 대화는 이랬다.
"찝찝해 죽겠어.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리세 이런 개xx... 그 놈은 나한테 그딴 말을 해서는 안됐어."
"그냥 무시하고 잠이나 자자."
"아니, 난 무시 못해. 그놈 방으로 갈 거야."
"안돼. 우리 방으로 돌아가자."
피넌은 미친 놈을 통제하는 교도관처럼 나를 안정시키고 방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참을 수 없었다. 우리 방의 바로 위층에 라운지가 있었다. 우리의 골프 클럽도 그 라운지에 있었다. 나는 그 골프채 중 하나를 꺼내고 리세가 한 말을 생각했다. 그 골프채는 8번 아이언이었다. 나는 리세 일을 생각하며 그 골프채를 가지고 스윙을 연습했다. 이윽고 나는 "이제 그놈 만나러 가자."라고 말했다.
나는 단지 리세와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는 트레이닝에서 몇번이나 내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나에게 팔꿈치로 툭툭 건드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를 보곤 '아니 저 xx가...'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의 방으로 가서 노크를 했다.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불을 켰더니 그는 자고 있었다. 리세는 불빛 때문에 내 눈을 피하고 그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나는 단지 골프채의 끝부분으로 그를 툭툭 쳤을 뿐이다. 그걸 스윙이라고 말하면 안 될 것이다. 그건 진짜 살짝 건드린 것이었다. 만약 내가 제대로 휘둘렸으면, 나는 천장까지 때려부셨을 것이다.
그때 피넌은 문 뒤로 숨어버렸고 리세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는 담요 뒤에 몸을 숨겼다. 나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네가 다른 애들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그렇게 말하다니. 나는 이걸로 니 머리통을 날려버릴거야."
리세가 대답했다. "일단 들어봐.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나는 계속 윽박질렀다. "넌 그럴 의도였어. xxx야!"
"아니, 아니야. 그럴 의도는 절대 아니었어."
"아니, 넌 그럴 의도였어. 그것은 니가 나를 열받게 한 몇번째 행동이었고 이제 내가 다신 그런일 없도록 만들어주지."
그때 난 평소보다 지나치게 마신 날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정신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몇차례 위협했다.
"그리고 만약 니가 이 일로 어떤 문제라도 발생시키면 내일 내 방에서 보게 될 줄 알아라. 이 일로 다른 사람들에게 찡찡대고 다니지 마."
나는 내가 했던 행동을 돌아보았고 내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한심한 일이었고 완전히 멍청한 짓이었다. 나는 너무 취했고 나쁜 행동을 범했다. 마침내 난 방을 나왔다. 피넌과 내가 우리방으로 돌아왔을 때, 코치들과 선수들은 밖에서 쉬고 있었다. 그들은 복도에서 우리와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내 손에 있는 골프채를 눈치채지 못했다. 눈치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
(중략)
내가 잠을 자고 있던 중 피넌이 내 방에 노크를 하며 말했다 "보스랑 수석코치님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계셔."
나는 'x댔다'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이유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베니테즈와 파코가 그들이 직접 제대로 세워놓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라파는 그 상황들에 혼란스러워진 상황이었다. 라운지는 접시들과 램프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라파는 나를 보고 자수하라고 말했다.
"리세가 방에 찾아와서 네가 골프채로 그를 공격했다고 말하더군."
"정확히 말하자면 때린 건 아니예요."
나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이미 그 일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파는 의외로 그냥 멍한 표정이었다. 알고 보니 라파는 오늘 밤 (선수들의 난동 때문에) 많은 일을 겪었더란다. 두덱은 술집에서 나갈 것을 거부했고 결국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그를 감방에 처넣었다. 라파는 직접 가서 그를 꺼내와야 했다.
난 정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저게 내가 한 일보다 나쁜 일이야. 그 일이 날 살렸구나.' 하지만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건의 전말은 밝혀졌지만 최근 발간한 자서전에서 제라드는 그 사건에서 벨라미가 리세의 발에 멍을 만들어 퉁퉁 붓게 만들어놓았다고 털어놨다.

이후, 여러 가지 이야기 끝에 피해자 욘 아르네 리세가 가디언을 통해 직접 썰을 풀었다. 골프채로 툭툭 건드렸다는 벨라미의 말과 달리 리세는 벨라미가 엉덩이와 허벅지를 마구 쳤다고 밝혔다. 그러다가 자신이 벨라미를 제압할 수 있을 거 같으니[4] 벨라미를 칠까 하다가 커리어가 끝날 것 같다는 생각에 때리지 않고 남자답게 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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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일로 동료를 폭행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몰린 그였지만, 디펜딩 챔피언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한 후 골프 스윙 세리머니를 선보여 리세와 나쁜 사이가 아니었음을 보여줬다.[5][6] 이후 벨라미는 리그 27경기 7골을 기록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 12경기 2골을 넣으며 총합 41경기에서 9골을 넣으며 조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하지만 그는 2007년 여름 토레스를 영입한 뒤 재정 적자를 만회하려는 리버풀에 의해 웨스트햄으로 보내졌다.

3.6.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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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0일, 벨라미는 7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웨스트햄으로 이적했다. 이 금액은 웨스트햄 역사상 가장 많은 이적료였다. 벨라미는 2007년 8월 11일 맨시티와의 홈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지만 팀은 2:0으로 패했다. 이후 그는 8월 28일 브리스톨 로버스와의 리그컵 경기에서 2골을 몰아치며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활약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두번의 장기부상에 시달린 벨라미는 겨우 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에서 박혀 지내야 했다. 이후 벨라미는 2008-09 시즌에 16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지만 웨스트햄은 그를 처분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토트넘 핫스퍼맨체스터 시티가 그를 영입하려 했다. 2009년 1월 18일, 맨시티는 1400만 파운드로 예측되는 이적료를 지불하며 벨라미를 영입했다.

3.7. 맨체스터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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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미는 2009년 1월 19일 맨시티와 4년 반 게약을 체결하고 입단했다. 마크 휴즈 맨시티 감독은 "나는 크레이그가 우리에게 완벽한 선수라고 확신한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그를 영입하길 가망한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벨라미는 1월 28일 뉴캐슬과의 홈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결승골을 넣으며 팀의 2:1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벨라미는 미들즈브러와의 리그 경기에서 두번째 골을 기록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끌었다.

2009년 2월 22일, 벨라미는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1:1 무승부를 이끌었다. 이로 인해 리버풀은 우승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벨라미는 2008-09 시즌 후반기에 맨시티에서 11경기에 출장하며 4골을 기록하며 팀에 많은 기여를 해줬다.

벨라미는 2009-10 시즌에도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2009년 9월 12일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리그 첫골을 기록하며 팀의 4:2 승리를 이끌었다.

1주일 후, 벨라미는 맨유와의 경기에서 2골을 몰아넣었지만 팀은 4:3으로 석패했다. 이때 넣은 2골은 실로 멋졌다. 첫번째 골은 20야드 바깥에 강력한 슈팅을 날려 골문을 흔든 것이었고 2번째 골은 추가 시간에 마틴 페트로프리오 퍼디난드의 엉성한 패스를 가로챈 후 전달한 공을 가지고 엄청난 속도로 돌파한 후 벤 포스터를 제치고 3:3 동점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중 첫번째 골은 나중에 '9월 이달의 골'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 경기 후 벨라미는 구설수에 휘말렸다. TV 중계화면에서는 그가 경기장에 난입한 맨유 팬의 얼굴을 손으로 친 광경이 포착되었다. 이에 대해 FA는 그에게 경고 조치를 내렸지만 맨시티는 그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지지했다.

이후 벨라미는 리그 32경기에 출장하여 10골을 기록하는 등 종합 40경기 11골을 기록하며 주전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특히 전시즌 에이스였던 호비뉴의 공백을[7] 훌륭히 매꿨기에 더욱 인상깊었다. 그러나 로베르토 만치니가 맨시티에 부임한 후 그는 뛸 자리를 잃었고, 결국 2010년 여름 그는 카디프로 임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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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7일, 벨라미는 그의 고향팀인 카디프 시티로 임대되었다. 카디프 시티의 감독인 데이브 존스는 그를 팀의 주장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벨라미는 8월 21일 돈캐스터 로버스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했고 35 야드 거리에서 프리킥 골을 작렬하며 4:0 승리에 견인했다. 이후 벨라미는 환상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35경기 11골을 기록했고 팀을 승격권까지 올려놨다. 카디프는 2010-11 시즌을 4위로 마감했고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벨라미는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여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하지 못했고 카디프는 레딩에게 3:0으로 패하고 승격에 실패했다.

이후 벨라미는 카디프에 남아서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데이브 존스 감독이 경질된 후 새로 부임한 매키 맥카이는 벨라미와 함께 하기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카디프와 계약하지 못했다. 이후 맨시티는 그를 자유계약 선수로 놓아줬다.

3.8. 리버풀 FC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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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31일, 벨라미는 리버풀과 계약을 체결하고 등번호 39번을 달게 되었다. 그는 "나는 케니 달글리시를 어릴 때부터 존경했다. 이제 그와 함께 하게 되어 정말 기쁘다."라고 밝혔다. 벨라미는 스토크 시티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뤘으나 팀은 1:0으로 패했다. 이후 그는 2011년 10월 22일 노리치 시티와의 경기에서 리그 첫골을 기록했다. 11월 27일, 벨라미는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결장했는데, 그의 친구이자 코치었던 게리 스피드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틀 후, 그는 팀으로 복귀했고 리그 컵 4강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2011년 12월 30일, 벨라미는 뉴캐슬을 상대로 중거리슛과 프리킥을 작렬하여 2골을 몰아넣으며 팀의 홈경기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벨라미는 교체로 나올 때마다 적절한 활약을 보여줬다. 그는 리버풀에서 33경기 출장하여 9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2012년 여름 리버풀에 부임한 브랜던 로저스는 그가 전력 외라는 것을 밝히고 그를 카디프 시티로 보내줬다.

3.9. 카디프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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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0일, 벨라미는 자유계약으로 카디프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카디프에서 2년간 55경기 6골을 기록했다. 2014년 5월 22일, 벨라미는 선수 생활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2014년 12월 30일, 벨라미는 카디프의 유스팀 코치로 부임했다.

4. 국가대표 경력

벨라미는 1998년 3월 25일 자메이카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그는 1998년 6월 4일 몰타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기록했다. 이후 그는 2013년까지 15년의 세월 동안 78경기 출장하여 19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웨일스는 워낙 약체팀이었던지라 FIFA 월드컵이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은 꿈도 꾸지 못했다. 2012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잉글랜드를 통합한 '영국 팀'이 결성되었고, 그는 여기에 소속되어 남자축구 부분에 출전했다. 하지만 영국은 올림픽 8강전에서 한국에게 패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이때 박주영의 뒤통수를 때렸다가 한국인들에게 욕을 푸짐하게 먹기도 했다.[8]

5. 평가

그는 한 팀에서 레전드라고 평가할 만큼 탁월한 활약을 한 적은 없지만 팀에 보탬이 될만한 선수임엔 분명했다. 탁월한 득점기계는 아니었지만 엄청난 활동량과 침투 능력, 주력, 적극적인 수비가담, 그리고 이 경기를 반드시 이기겠다는 투지력은 충분히 EPL에서 활약할 만했다. 다만 공중볼 경합에서 약점을 보였다. 이렇듯 훌륭한 재능을 갖췄지만 불같은 성격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고 이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가 박해진 면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확실히 프리미어리그에서 제몫을 톡톡히 하였고 라이언 긱스, 가레스 베일과 함께 웨일스의 대표 선수임에 분명하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1] 대표팀 역대 득점 7위.[2] 그나마도 2골은 PK골이었다.[3] 이적료는 공개되지 않았다.[4] 169cm인 벨라미와 달리, 리세는 187cm이다.[5] 심지어 이 경기는 원정팀의 무덤 캄프 누에서 열린 경기였는데, 리버풀이 2-1로 이겼다. 나머지 한 골은 리세가 넣은 것이었고 그 골의 어시스트는 다름아닌 벨라미였다![6] 사실 세리머니 할 때에는 벨라미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아서 기분이 나빴다고 한 리세였으나 리세가 벨라미의 어시스트로 역전골을 넣고 나서 다 풀렸다고 밝혔다고 한다.[7] 이적 첫 시즌엔 팀에이스로 활약했지만 두번째 시즌엔 향수병 문제로 부진했고 결국 시즌 중반에 브라질로 임대갔다. 임대 복귀 후엔 AC밀란으로 이적했다.[8] 상황을 설명하자면 벨라미가 하이파이브를 해주려던 걸 박주영이 못보고 지나친 탓에 뻘쭘 했는지 손으로 뒤통수를 치면서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한다. 거기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놀란 박주영이 돌아보자 머쓱한듯 엄지를 올려주고는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