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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왕국 ព្រះរាជាណាចក្រកម្ពុជា Royaume du Cambodge | |
국기 | 국장 |
1953 ~ 1970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캄보디아), | 크메르 공화국 |
위치 | 동남아시아 |
수도 | 프놈펜 |
정치체제 | 군주정 |
국가원수 | 국왕 |
종교 | 불교 |
언어 | 크메르어, 프랑스어 |
통화 | 캄보디아 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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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부터 1970년까지 오늘날 캄보디아에 존속했던 왕국. 캄보디아 내전 이후 1993년 성립된 캄보디아 왕국에 대해서는 캄보디아 문서를 참고할 것.2. 역사
프랑스 식민제국의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했던 캄보디아는 1945년 일본 제국이 동남아를 침공하자 독립을 선언했다. 노로돔 시아누크를 중심으로 성립된 캄보디아 왕국은 사실상 일본 제국의 괴뢰국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짧게 존속하다가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잠깐 공백기가 생기는 듯 했으나, 프랑스의 식민지로 도로 복귀했다.그러나 캄보디아 민중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자 10월에 정당 결성을 허하고 민족의회 구성을 요구했으나, 프랑스와 괴뢰왕정의 예상과는 달리 민주당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이에 시아누크 왕은 프랑스와 결탁해 총선을 무효로 돌리고 민족의회를 무력화시키자 민족의회는 '놀고먹는 곳' 취급받았다. 그 상태로 1949년에는 괴뢰왕정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서북부에선 1948년에 선응옥타인의 민주/민족주의 무장세력 '크메르인민자유위원회(KNLC)'가, 동북부에선 1951년에 베트민의 지원을 받는 좌익무장단체 '크메르인민혁명당(KPRP)'이 각각 대두하여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지자, 1953년 1월에 시아누크 왕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의회를 해산시켰다. 같은 시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더이상 식민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1953년에 정식으로 캄보디아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독립 승인을 이룬 시아누크 왕은 귀국 당시 국민들로부터 영웅으로 찬사를 받았다.
독립 이후 한동안 옛 왕가의 후손[1]인 시아누크 왕이 입법-행정-사법 3권을 장악하며 사실상 전제 정치를 했는데, 1963년 그는 수상으로서의 자신의 임기를 영구히 하는 헌법 개정을 국회에 강요하여 통과시켰다. 국민투표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왕당파가 선거에 참패하자 강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한것이다.
시아누크는 좌파와 우파를 조절하며 '불교 사회주의'라는 괴상한 사상을 만들었고, 정치적 통제, 협박, 후원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이 과정에서 비밀경찰 등을 다수 동원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운 좋게도 세계전쟁에도 식민 시절 갖춰둔 도로나 철도 등의 시설이 거의 온전하게 보전되었기에 독립 이후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경제성장을 이뤄낸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어 가자 이러한 정책의 유지가 심각하게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시아누크가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대신 북베트남에게 호찌민 루트를 제공하였기 때문인데, 그 결과 동부 지방이 베트남 전쟁에 휘말린 것은 물론이고 미국의 초토화 폭격까지 불러들였다.
또한 국경을 넘는 쌀 밀매가 캄보디아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시아누크 자신 또한 경제분야를 신경쓰기보다는 권력유지와 개인 축재에 신경을 많이 썼으므로 캄보디아의 경제는 점차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같은 시기에 벌어진 좌익 농민투쟁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의심을 받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말 이전에는 캄보디아의 경제력이 태국과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던지라, 캄보디아인들이 캄보디아가 내전상태에 빠지지 않았으면 태국만한 경제력을 지녔을텐데라면서 그리워하는 원인이 되었다.
경제적 분야를 제외하더라도 시아누크가 나라의 우두머리로서 이루어낸 치적은 별볼일이 없다. 그 중 하나는 외교적 면이다. 시아누크는 자신의 사욕에 이득이 된다고 판단될 때마다 미국, 중국, 소련, 유럽 등에 무차별적으로 우호적 제스쳐를 보냈고, 1964년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서방세력과 단교하여 중국과 수교했는데, 이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1968년에는 다시 미국과 수교하여 단기적으로는 각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냈으나 이런 줄타기 외교는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공산권에선 기회주의자로, 서방세계에선 빨갱이 취급을 각각 당하여 국제사회에서 시아누크 치하의 캄보디아는 믿을수 없는 국가로 낙인찍혔다. 냉전시기의 국제사회에서 구분없는 외교적 구애는 득 될것이 전혀 없었으나 시아누크는 이를 짐작하지 못했다.
시아누크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지식인과 반대파를 숙청함으로써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그러나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는 서방세계와 다르기에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전술했듯 시아누크가 주장한 캄보디아의 질서는 불교식 사회주의였다. 이는 시아누크를 부처의 대변인으로 보는 것을 골자로 하며 시아누크는 종교적, 정치적 양면에서 최고의 위치를 확보했다. 캄보디아가 전통적으로 불교국가였고 불교의 세력이 강했음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그랬던 시아누크가 1970년 소련 방문 시점에 국회로부터 폐위를 당해 왕정이 멸망했고, 이후 국체는 옛 친구인 론 놀 장군의 크메르 공화국으로 이어졌다.
이원복 교수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의외로 캄보디아 국민들은 시아누크 독재체제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하는데 집권 당시 이들에겐 철권통치 덕에 겉으로 평화를 유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정치와는 별개로 캄보디아 대중문화가 가장 전성기를 누렸을때까 바로 캄보디아 제1왕국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캄보디아는 동남아에서 축구실력이 꽤 센축에 드는 나라로 등극하면서 박스컵에서 우승까지 거두는 토대를 마련했을대가 이때였다. 또한 시아누크가 대중문화 진흥에는 열성적이었다. 물론 TV가 보급되기 이전이라 영화가 그 역할을 대신했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해야되지만[2] 그래도 1년에 영화제작편수가 300편에 달했을 정도로 캄보디아 영화는 전성기를 누렸었고, 캄보디아 음악 역시 꽤 융성해서 태국에서 캄보디아 가요를 표절했던 시대였기도 했다.[3]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경제성장에 따라서 캄보디아의 대중문화계가 정상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경제의 낙후와 적은 인구규모로 인해서 태국, 베트남 및 한국, 중국, 일본의 대중문화에 잠식당하는 판이라는 말이 나오는지라 캄보디아 대중문화계에서는 1960년대가 그리울수밖에 없기도 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1960년대 말에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위기가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1960년대 말까지만해도 태국과 1인당 국민소득이 큰 차이 없이 비슷했고, 인도네시아에 비해서 월등히 잘살았는데 1970년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혼란기 동안 캄보디아가 초토화되면서 태국과 말레이시아는 물론이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도 뒤처진 후진국으로 전락해버리다 보니 그에 대한 아쉬움이 남은 것이다.
3.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120~124.
4. 관련 문서
[1] 사실 엉두옹, 노로돔 왕을 비롯해 프랑스 아래에서도 왕은 계속 자리를 지켜내었으며 지금의 왕궁도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 지어준 것이다.[2] 동시대 한국도 2000년대에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되기 이전에 영화관객수가 가장 많던 때가 1960년대였다.[3] 다만 박스컵 우승이나 아시안컵 4강은 엄밀히 말하자면 1970년대 초반의 일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