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사후네 카게미츠 작의 타치
코류 카게미츠(小竜景光) | |||
도공 | 오사후네 카게미츠(長船景光) | 도파 | 오사후네파 |
제작 시기 | 가마쿠라 시대 | 종류 | 타치 |
길이 | | 현존 여부 |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
명문 | (앞) 備前国長船住景光 (뒤) 元享二年五月日 | 문화재 등록 | 국보 공예품 제 66호 |
천황의 충신으로 유명한 가마쿠라 시대의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일본도이다. 종류로는 타치로 분류된다.
오사후네파의 유명 도공인 오사후네 카게미츠(長船景光)의 작품인데, 새겨진 명문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제작시기는 겐코(元享) 2년(1322)이다.
자루 쪽에 정교한 쿠리카라용을 새겼다. 원래는 용의 모습이 도신에 드러나 있었으나 후일 자루 쪽을 잘라 길이를 줄이는 과정에서 용의 몸이 자루에 가려졌기에 노조키류 카게미츠(のぞき竜景光, 엿보는 용 카게미츠)라는 별명이 생겼다. 용의 반대편에는 밀교에서 부동명왕을 상징하는 종자자(種子字)[1] 함망(hāmmāṃ)을 실담 문자로 새겼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검이었다는 점에서 구스노키 카게미츠(楠木景光), 구스카고류노 타치(楠籠龍ノ太刀)라는 별명도 있다.
도사의 무녀의 등장인물인 무스미 키요카가 원래 이 검에게 선택받아 사용했었던 어도였으나 현재는 이 검에 의해 버림받았다.
1.1. 내력
야마다 아사에몬의 기록에 의하면 마데노코우지 후지후사(萬里小路藤房)[2]가 구스노키 마사시게에게 넘겨주었으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을 거쳤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1719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에 의해 도검 감정의 명가 혼아미(本阿弥)에서 전국의 명검들을 조사해 작성한 교호명물장(享保名物帳)에 등장하지 않는 등,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많다.코류 카게미츠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였으나, 에도 시대 말에 어떤 카와치의 농가에서 발견되었다. 이를 한 도검상이 구해다가 혼아미가에 감정을 의뢰했다. 혼아미 측에서는 위작이라 판단하고 감정서 발급을 거부하였다. 이후 나카무라 카쿠타유(中村覚太夫)라는 한 지방관에게 팔렸다. 그가 죽고 나서 1846년에 다른 도검상에게 팔렸다. 이후 조슈 번의 다이묘인 모리(毛利)가에서 구매했으나 혼아미가 감정서를 발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반품하였다. 그 다음에는 참수형 집행 및 도검 감정을 업으로 삼던 야마다 아사에몬가에 넘어갔다.
6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마사(吉昌)는 코류 카게미츠를 다이로 이이 나오아키(井伊直亮)에게 넘겼으며, 대신 나오아키는 야마다 아사에몬 요시마사의 의형제인 미와 토쿠조(三輪徳蔵)를 휘하로 들였다. 그러나 1860년, 나오아키의 아들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 밖의 변으로 암살당했다. 이 때문에 미와 토쿠조는 해고, 코류 카게미츠는 다시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돌아왔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후 1873년에 코류 카게미츠는 천황가에 헌상되었다. 코류 카게미츠를 메이지 덴노가 서양의 세이버식으로 꾸며 패용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일본의 도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말로 메이치가 패용했는지 여부를 두고는 서로 의견이 엇갈린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옮겨 소장중이고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2. 도검난무-ONLINE-의 등장 캐릭터
코류 카게미츠(도검난무)[1] 밀교에서 특정 부처나 보살, 명왕 등을 상징하는 소리(音), 또는 그 소리를 적은 글자를 말하는데, 밀교 수행자에게는 중요한 상징이다. 종자자는 보통 한 음절이지만 드물게 두 음절일 때도 있다. 소리의 음가는 산스크리트어를 기준으로 하지만, 종자자가 산스크리트어로 어떤 특정한 의미가 있는 단어인 것은 아니다.[2] 1296~?, 가마쿠라 시대 말과 남북조시대에 활약했던 쿠게(公家)로, 츄나곤(中納言)직에 있었다. 에도시대에는 구스노키 마사시게, 타이라노 시게모리와 함께 일본삼충신(日本三忠臣)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