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후트 빌모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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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클럽 | ||||
10대 |
헝가리의 前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코후트 빌모시[1] Kohut Vilmos | |
출생 | 1906년 7월 17일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 ||
사망 | 1986년 2월 18일 (향년 79세) | |
헝가리 부다페스트 | ||
국적 | [[헝가리|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5cm | 체중 71kg | |
직업 |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페렌츠바로시 TC (1924~1933)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3~1939) 님 올랭피크 (1939~1940) FC 앙티브 (1945~1946) |
감독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8~1939 / 선수 겸 감독) 님 올랭피크 (1939~1940 / 선수 겸 감독) FC 앙티브 (1945~1946 / 선수 겸 감독) 센틀뢰린치 AC (1948) | |
국가대표 | 25경기 14골 (헝가리 / 1925~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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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전 축구 감독.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코후트는 1924년 4월에 페렌츠바로시 TC의 1군에 데뷔했고 다음 시즌부터는 팀의 주전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입지를 굳혔다.1926년에 페렌츠바로시는 13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MTK 헝가리아의 리그 10연패를 저지했다.
1926-27시즌에 코후트는 리그에서 11골, 헝가리 컵에서 4골을 넣었고 팀은 더블을 차지했다. 그리고 코후트 역시 헝가리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어 생애 최고의 해를 보냈다.
1927-28시즌은 팀에게 더 성공적인 해였다. 2년 연속 더블에 미트로파 컵까지 우승했다. 1927년에는 페렌츠바로시가 미트로파 컵에 불참했지만 1928년에는 우승했고 코후트는 SK 라피트 빈과의 결승전에서 1차전 2골, 2차전 1골을 묶어 3골을 넣었다. 마자르 쿠파 결승전에서는 미슈콜치 AK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했고 페렌츠바로시의 5대1 승리로 끝났다.
다음 시즌에 페렌츠바로시는 미트로파 컵 참가 대신 수익성이 더 좋은 남미 투어를 떠났고 6승 2무 6패의 성적을 거뒀다.
코후트는 1933년까지 페렌츠바로시에서 뛰면서 총 434경기 출전 219골을 기록했다. 1933년의 마자르 쿠파 결승에서는 우이페슈트 FC를 11대1로 초전박살내기도 했다. 그의 페렌츠바로시에서의 마지막 경기는 1933년 6월에 있던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친선 경기였다.
코후트는 1933년에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이적했고 이적하자마자 팀의 핵심이 되었다. 코후트는 리그 적응따위는 별 거 아닌듯 리그 16골, 컵 대회 10골을 넣었지만 팀은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1935년에 코후트는 쿠프 드 프랑스에서 스타드 렌 FC를 3대0으로 꺾고 우승함으로써 프랑스 이적 이후 첫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코후트는 이 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마르세유에서 코후트는 1939년까지 뛰면서 리그 우승 1회, 컵대회 우승 2회를 더 차지했다. 1938년부터는 선수 겸 감독이 되어 마르세유를 이끌었다.
1939년에 코후트는 님 올랭피크로 이적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리그가 중단되었고 1945년에 앙티브에서 1년을 더 뛰며 선수 커리어를 마감했다
2.1.2. 국가대표
코후트의 대표팀 데뷔전은 1925년 1월 18일에 있었던 이탈리아전이었고 헝가리는 2대1로 승리를 챙겼다.코후트의 대표팀 데뷔골은 그의 6경기째 경기였던 1926년 6월 6일의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나왔고 그의 결승골로 헝가리는 2대1 승리를 거뒀다.
1927년, 헝가리 대표팀에는 페테르 서보 가보르 뿐만 아니라 1926년 이탈리아 리그 득점왕 경력이 있는 공격수 히르제르 페렌츠(Hirzer Ferenc)가 헝가리로 복귀해서 코후트와 치열한 자리 경쟁이 우려되었다. 헝가리에 복귀한 히르제르도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경기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르제르는 대표팀에서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정착했고 코후트와 가보르가 경쟁하는 헝가리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진은 매우 강력했다.
1927년 6월, 헝가리는 프랑스를 13대1로 깨박살을 내며 프랑스에 큰 굴욕을 안겨주었다. 코후트는 이 경기에서 2골을 넣었다. 그 이후 코후트는 대표팀 경기에서 6경기 연속골을 넣으며 득점포를 본격적으로 가동했고 그의 연속골 행진은 1928년 5월 6일의 오스트리아전의 해트 트릭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코후트는 클럽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는 대표팀과 다소 동떨어진 커리어를 보냈다. 프랑스로 떠난 이후에는 아예 대표팀과 거리가 멀어졌다가 6년 만에 치러진 복귀 경기가 바로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코후트는 1라운드 네덜란드령 동인도전에 출전, 헝가리의 대회 첫 득점을 올렸고 헝가리는 6대0으로 손쉽게 승리를 챙겼다.
코후트의 대표팀 경기는 8강 스위스전이 마지막이 되었고 그는 대표팀에서 25경기에 출전, 14골을 넣었다.
2.2. 감독 생활
그는 대부분의 감독 생활을 선수 겸 감독으로 보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빠르고 지칠 줄 모르는 아웃사이드 포워드. 강하고 정확한 왼발 슈팅도 겸비했다.당시 페렌츠바로시 TC의 팬들은 응원 구호로 그의 성을 길게 늘여 불렀다.
4. 수상
4.1. 대회 기록
- 페렌츠바로시 TC (1924~1933)
- 넴제티 버이녹샤그 I: 1925-26, 1926-27, 1927-28, 1931-32 / 준우승: 1924-25, 1928-29, 1929-30
- 마자르 쿠파: 1926-27, 1927-28, 1932-33 / 준우승: 1930-31, 1931-32
- 미트로파 컵: 1928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3~1939)
4.2. 개인 수상
- 헝가리 올해의 선수: 1927
4.3. 감독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38~1939)
- 디비지옹 1 준우승: 1938-39
[1] 헝가리 출신 인물은 성+이름의 조합으로 이름을 표기하고 항목명도 그에 따랐다. 다만 인터넷 검색을 하려면 서양식으로 이름+성의 순으로 검색하는 게 더 찾기 쉽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