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크누트 브뤼닐센 (Knut Brynildsen) |
생년월일 | 1917년 7월 23일 |
사망년월일 | 1986년 1월 15일 (향년 68세) |
국적 | 노르웨이 |
출신지 | 프레드릭스타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불명 |
소속팀 | 프레드릭스타 FK (1934-1950) |
국가대표 | 18경기 10골 (1935-1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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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브뤼닐센은 빠르게 프레드릭스타 FK에서 자리를 잡았고 20세가 되기도 전에 노르웨이 컵에서 2번 우승을 맛보았다. 그는 1935년 컵 결승전에서 사르프스보르그(Sarpsborg)를 상대로 2골을 넣어 프레드릭스타의 4대0 승리를 이끌어 그의 이름을 노르웨이에 알려갔다. 이는 노르웨이 컵 역사상 최연소 결승전 득점 기록이기도 하다.1938년, 브뤼닐센은 륀 1896 FK과의 결승전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해서 프레드릭스타가 엘리테세리엔의 창설 시즌 우승에도 힘을 보탰다. 브뤼닐센은 자신의 득점 중 이 해 노르웨이 컵 5라운드 오드 BK를 상대로 넣은 득점을 커리어 최고의 득점으로 꼽기도 했다.
페널티 스팟에서 2m쯤 떨어진 곳에서 가죽에 영혼과 몸과 발목을 올려야했습니다. 골키퍼가 직감적으로 내리는 결정을 듣기도 전에 공은 윙윙거리며 네트 지붕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나왔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제가 기록한 최고의 골이었습니다.
크누트 브뤼닐센
크누트 브뤼닐센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노르웨이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다. 브뤼닐센은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치하에서 적극적으로 나치 독일에 저항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1949-50 시즌까지 브뤼닐센은 팀 내 최다 득점자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고 1950년 봄에 마지막 경기를 뛰고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브뤼닐센은 1935년 11월 3일, 당시 18세의 나이에 노르웨이 대표팀에서 첫 경기를 치렀지만 노르웨이는 스위스에 0대2로 패배했다.하지만 브뤼닐센은 한동안 대표팀과 거리가 먼 생활을 보냈다. 1936년 올림픽과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도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프랑스 월드컵 본선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브뤼닐센의 대표팀 2번째 경기가 바로 노르웨이 대표팀 역사상 첫 FIFA 월드컵 경기였던 1라운드 이탈리아전이었고 그는 센터 포워드로 선발 출전했다. 그러나 브뤼닐센은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고 노르웨이는 연장전까지 치렀지만 이탈리아에 1대2로 아쉽게 패했다.
이후 브뤼닐센은 한동안 노르웨이 대표팀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했고 1948년까지 18경기에 출전, 10골을 넣었다.
2.2. 이후
1953년부터 브뤼닐센은 프레드릭스타 FK의 옴부즈맨으로 일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공격 빌드업과 강력한 슈팅 능력을 가졌던 포워드.엘리테세리엔에서는 중요한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는 6번의 노르웨이 컵 결승과 3개의 리그 결승에 출전했고 꾸준히 득점을 올렸다. 9번의 결승전에서 총 8골을 넣은 그는 여전히 노르웨이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결승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어있다.
4. 뒷이야기
- 브뤼닐센은 프레드릭스타의 주요 사탕 제조업체인 브뤼닐센 그룹의 상속인이라 생계 유지엔 큰 문제가 없었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2]
- 엘리테세리엔 우승 3회: 1937-38, 1938-39, 1948-49
- 노르웨이 컵 우승 4회: 1935, 1936, 1938, 1940
- 노르웨이 컵 준우승 3회: 1945, 1946,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