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이명 | 탁마리아 |
출생 | 1900년 12월 4일 |
함경남도 함흥군 서호면 서애리 | |
사망 | 1972년 10월 24일 (향년 71세) |
제주도 서귀포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
서훈 | 2013년 건국포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탁명숙은 1900년 12월 4일 함경남도 함흥군 서호면 서애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이 서울로 상경하여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 1월 고종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의 인산에 참여했다. 그러던 3월 5일 도량동에 거주하는 오화영의 집에 가던 중 명월관 앞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남대문까지 행진했다. 군경이 이를 저지했지만 만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계속했다. 이때 시위대를 이끌던 강기덕 등 50명이 경찰에게 체포되어 연행되자, 시위대는 2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남대문 안 시장으로부터 조선은행 앞을 거쳐 종로 쪽으로 행진했고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 안에서 태평통, 대한문 앞, 황금정 1정목을 거쳐 종로로 향했다.두 대열은 보신간 앞에서 조우했고, 군중의 수는 더욱 늘었다. 이에 일제 경찰대는 병력을 증강한 뒤 검을 빼어 휘두르며 해산을 강행했고,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75명이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때 탁명숙도 체포되었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부임할 때 강우규가 폭탄을 투척한 뒤 도주하자, 그녀는 9월 13일 강우규를 자신의 지인인 임재화(林在和)의 집에 피신시켰다. 나중에 이 일이 드러나면서 체포된 그녀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20년 고향인 함경도로 돌아온 탁명숙은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사립 동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여성 교육에 힘썼다. 1922년에 제주 성산읍 출신인 현이길과 혼인해 제주도로 이주했으며, 8.15 해방 후인 1947년 8월 애국부녀연맹 남제주군지부를 결성했고 1952년 자유당 제주도지부 부녀부장을 역임했다. 특히 제주 4.3 사건 당시 고아가 많이 발생하자 1951년 제주보육원을 설립해 육영 사업에 헌신했다. 1963년 제1회 대한민국 건국문화포상을 수상했고 1972년 10월 24일 서귀포시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탁명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