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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국과 오키나와의 관계를 서술한 문서. 관련 논문2. 역사적 관계
2.1. 접촉
류큐와 태국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은 1371년으로, 아유타야 왕국과 중산이 그 주인공이었다.중산의 왕 삿토가 1372년에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맺은 이후, 류큐 왕국은 중화 질서의 가까운 종속국이 되어 명나라로부터 정치적, 상업적 인정을 받았다.
이는 명나라에게 조공으로 바치기 위한 수출품의 필요성은 류큐가 15세기 초 아유타야 왕국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와의 대외 관계를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2.2. 아유타야-류큐
동남아시아로 항해할 때마다, 류큐는 아유타야에 다양한 종류의 선물을 가져왔다. 많은 선물들 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은 비단, 중국산 도자기[1], 최상급 칼, 종이로 만든 부채, 그리고 유황을 가져왔다.[2]류큐가 아유타야와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동안, 아유타야도 류큐와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대표적인 증거로는 아유타야 왕국이 류큐 왕국으로 보낸 편지가 있겠다.
류큐에서 아유타야로 보내는 편지가 51통의 편지가 있지만, 류큐의 왕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아유타야의 편지는 고작 7통에 불과했으며, 모두 중국어로 쓰여 있었다.
7통의 편지 중 첫 번째는 아유타야가 무역 거래가 완료되자마자 류큐 특사를 류큐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내용의, 1430년에 쓴 류큐 왕국 왕에 대한 답변이다. 나머지는 1479년-1480년 류큐 근처의 아유타야 선박의 난파선에 관한 것이다.
류큐가 아유타야에 보낸 공식 편지에 따르면, 류큐산 항해의 주요 목적은 후추를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유타야에서 보낸 상품은 실제로 기록된 것과 달랐다.
예를 들어, 왕과 그의 관리들이 아유타야 왕국의 난파선 생존자들을 아유타야로 다시 데려온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류큐에 보낸 선물에는 여러 종류의 작물, 장미 같은 화려한 꽃들, 그리고 고급 술이 포함되었다.
이런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류큐 왕국과 아유타야 왕국의 관계는 정말 돈독했다.
2.3. 시암-류큐
이렇게나 돈독했던 두 나라의 관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쇠퇴했다.우선 아유타야 왕국은 버마와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지쳐있었고, 다른 나라와의 외교에 신경을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후 왕국은 멸망하고, 시암의 톤부리 왕조가 세워진다.
이 당시 류큐 왕국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1609년 사쓰마의 침공으로 반 속국 상태가 되었으며, 이후 1879년 강제로 일본 제국에 합병되면서 외교권을 상실했다.
이렇게 알 수 있듯이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결국 1570년 류큐가 시암으로 배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교류는 끊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