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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오키나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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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오키나와현
1. 개요2. 역사적 관계3. 지리적 관계
3.1. 공통점
4. 센카쿠 열도 분쟁
4.1. 오키나와현의 입장4.2. 류큐 독립주의자들의 입장4.3. 대만의 입장
5. 류큐 독립에 대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만오키나와의 관계를 서술한 문서. 관련 논문

2. 역사적 관계

2.1. 명나라

우선 류큐 왕국은 통일 이후 명나라와 다른 나라들의 교역 허브로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게 주요 수입원이 되어 버려서 왕 쇼엔은 쿠데타로 왕위에 오르자마자 명나라한테 '''부왕이 죽어 세자인 제가 뒤를 이었습니다."'라는 거짓 보고를 올려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그만큼 명나라와의 교역은 류큐 왕국의 주된 수입이었으며 다른 나라가 10년에 조공 한번 보낼 때 류큐는 2년동안 한번 조공을 보내기도 했다.

류큐의 이러한 노력을 본 명나라에서도 류큐를 우대하였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였다. 명나라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중개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그렇게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2.2. 동녕 왕국

대만에서 동녕 왕국이 건국되었을 때 두 지역 모두 한때 동아시아 해역(14~17세기)의 무역 허브의 중심이었다: 류큐는 중국,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다양한 국가로 가는 다리"가 되면서, 14~17세기에 "황금 시대"에 들어갔다. 대조적으로, 13세기와 14세기 동안 중국과 남해 사이의 빈번한 무역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중국과 대만 사이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540년에서 1700년 사이에, 동아시아 해로는 일본 은, 중국 실크 및 기타 상품에 대한 무역으로 활기를 탔다. 이때, 중국이 은 기반 통화에 필요한 은의 4분의 3은 서일본에서 왔다. 그러나 이 활발한 무역은 직접 이루어지지 않았다. 홍콩이 1988년과 2008년 사이에 대만과 중국 본토의 제3자 터미널이었던 것처럼, 한국, 하노이, 마카오, 류큐, 대만은 모두 일본-중국 실크 무역의 중요한 장소였다.

당시 대만은 중국 정부와 실질적인 정치 조직이나 공식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복건 해상 무역 사업가인 Zheng Zhilong은 네덜란드인, 스페인인, 그리고 Zheng Chenggong의 가족이 이 섬에 연속적으로 무역점을 설립했다. 일본 은에 뿌리를 둔 정 가문의 부는 대만에서 정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국-일본 은 무역을 핵심으로, 유럽, 동남아시아, 일본, 중국 본토 및 다른 곳의 다른 상품들도 대만에서 거래되어 아시아 태평양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17세기에 중국인들이 대만으로 몰려들었고, 소수 집단에서 결국 대만의 대다수 인구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까지, 일본은 은을 국내용으로 제한했다. 그 결과 중일 비단과 은 무역이 감소했고, 류큐 왕국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1609년부터, 동녕 왕국은 청나라에, 류큐는 일본에 복속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막을 내렸다.

2.3. 청나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청-류큐 관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4. 중화민국

일단 류큐가 1880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보니 명나라&청나라 시대의 관계를 유지할 수는 당연히 없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의 수교, 대만과 일본의 수교 단절로 더욱 관계가 사라졌다.

그런데 2차 대전 말기 미국은 전후 중화민국에 류큐를 '반환'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장제스가 사양했다고 한다. #

그중 1940년대부터 1952년에 걸친 시기는 오키나와의 귀속이 가장 애매한 시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의 전후처리에 임한 장제스는 한때는 미국과 중국에 의한 공동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그러나 국부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함으로써 국제적인 영향력을 잃어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에서 일본에 잠재주권을 인정하면서 미국이 대일평화조약 제3조에따라 오키나와를 배타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이 확정되었다.

2.5. 대만

한편 동아시아에서도 냉전 구조가 형성되는 가운데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강화되었으며 애초에는 국내 상황 때문에 오키나와 귀속문제에 무관심했던 한국 정부도 한국전쟁을 거쳐 자국의 안전이 오키나와 기지와 직결되어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 한때 침묵을 지키던 국부 역시 1953년 아마미군도반환을 계기로 오키나와 귀속문제에 다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1954년에 국부와 한국 정부는 아세아민족반공연맹(APACL)을 결성하고 여기에 류큐 대표를 참여시키며 오키나와에도 반공연맹을 조직하게 함으로써 오키나와를 반공 독립 쪽으로 향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일본복귀론의 뿌리가 단단했으며, 또 미국 정부가 APACL 회의에 오키나와 출신자가 참여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오키나와의 지위에 대한 오해가 생길까 우려해 현지 미국 기관(USCAR) 이 공개적으로 APACL 지부 결성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명한것 등으로 인해 오키나와 현지에서 그것에 대한 지지는 확산되지 않았다.

더욱이 APACL 자체도 1956년까지 일본 참가를 두고 한국 정부와국부가 대립함으로써 기능부전에 빠졌기 때문에 이 시기에 류큐 독립론이 국제사회에서 널리 인식되는 일은 없었다. 1956년이 되자 토지문제를 계기로 오키나와에서 현상 변경에 대한요구가 높아지면서 관계 각국은 새로운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 정부와 국부는 일본의 반공 태도가 애매하다는이유로 현상 유지 또는 오키나와 독립을 요구하는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양자가 바란 반공 독립국가로서의 ‘류큐’는 일본복귀론이거세지던 실제 오키나와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3. 지리적 관계

사실 역사적 관계는 중국하고 똑같아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대만과 오키나와의 관계는 지리적인 이유로 주목받는다.

3.1. 공통점

우선 대만과 류큐는 모두 흑조 문명 지대 내에 있다.[1] 그 당시, 카사바와 얌과 같은 작물은 필리핀에서 대만, 류큐에서 규슈로 이어지는 쿠로시오 해류와 함께 북쪽으로 항해했고, 동남아시아 북부의 기장과 같은 작물은 남해를 통해 대만으로 항해했으며 중국의 양쯔강 남쪽에서 한국을 거쳐 규슈로 가는 쌀 경로와 함께,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에서 두 개의 중요한 해상 문화 교류 경로였다.

그러나, 3세기까지, 양쯔 남쪽에서 일본 중부로 가는 직항 노선과 중국 북서부의 장안에서 중앙 아시아까지의 실크로드, 그리고 광저우에서 인도로 가는 운송 노선이 앞서 언급한 노선을 대체했다. 그 결과, 대만과 류큐 제도는 약 천 년 동안 국제 무대에서 고립되었다.

4. 센카쿠 열도 분쟁

4.1. 오키나와현의 입장

명백한 일본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게재된 공식 입장을 옮기면, "센카쿠 제도가 일본 고유 영토임은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하며, 실제로 일본국은 이를 유효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센카쿠 제도를 둘러싸고 해결해야 할 영유권 문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일본 외무성은 다른 분쟁지역에 대하여는 '다케시마 문제'라는 표현을 쓰는 반면, 자신들이 실효지배하는 센카쿠에 관하여만 '센카쿠 제도를 둘러싼 정세'라고 에둘러 표현하여 영유권 문제가 없음을 애써 강변하고 있다.

일본은 센카쿠 열도에 대해 1885년 오키나와에 살던 후쿠오카 현 출신 사업가 고가 다쓰시로(古賀辰四郞)가 발견한 뒤 일본 정부가 무주지(無主地)임을 확인하고 1895년 1월 14일 오키나와 현에 정식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무주지를 영토로 편입했으므로 센카쿠 열도는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주장을 중심으로 센카쿠 열도 개척의 날이라는 기념일까지 만들었다.

이 같은 영유권 분쟁은 북한 핵개발 문제와 함께 일본 내에서 평화헌법 개정의 명분과 군비 강화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4년 7월 내각의 결정에 따라 헌법해석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는 우익 세력의 오랜 숙원인 헌법개정의 전초작업에 해당한다. 개헌이 국내여론상 어렵다고 판단되자 헌법 9조의 해석 변경을 단행하여 개헌과 비슷한 효과를 보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또 경항모급인 이즈모함을 건조하고 차세대 주력전투기로 쓰일 F-3 개발과 미국으로부터 F-35를 도입하는 등의 조처를 통해 군사력 강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7년 아베 총리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공식적으로 일미안보조약 제5조의 대상이 됨을 재천명하였다. 이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결코 공짜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일본의 센카쿠 열도 점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대가로 일본 정부는 미국에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4.2. 류큐 독립주의자들의 입장

일본이 오키나와와 묶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곳이니 만큼 류큐 독립주위자들도 당연히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류큐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 정부와 동일하게 센카쿠 열도가 현재는 오키나와현 소속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류큐가 독립할 경우 명백히 류큐 공화국의 영토가 돼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다만 근래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영토 분쟁이 격화되자 독립 운동에 불똥이 튀었다. 독립 시 센카쿠 열도를 중국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겠냐는 우려 때문에 독립 찬성 여론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 일각에서 오키나와 현 현지의 독립 운동가들의 입장과 무관하게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류큐 독립이나 류큐의 중국 편입 같은 주장이 나오자, 류큐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 극우 세력으로부터 중국의 지원을 받았느니 어쩌니 같은 사실과 다른 음해에도 시달리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류큐 독립 운동 문서를 참고할 것.

4.3. 대만의 입장

釣魚臺列嶼(Diaoyutai Islets)是臺灣的附屬島嶼,其行政管轄隸屬臺灣省宜蘭縣頭城鎮大溪里。無論從歷史、地理、地質、使用與國際法來看,釣魚臺列嶼都是中華民國的固有領土。
댜오위타이 열도(Diaoyutai Islets)는 대만의 부속 도서이며, 그 행정 관할은 대만성 이란현 터우청진 다시리에 예속되어 있다. 역사, 지리, 지질, 국제법적 관점을 막론하고, 댜오위타이 열도는 중화민국의 고유 영토이다.
출처: 대만 외교부, 中華民國對釣魚臺列嶼主權的立場與主張(중화민국의 댜오위타이 열도 주권에 대한 입장과 주장)

명백한 대만 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이미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 일본 어부들이 없는 틈에 대만 어부들이 이 섬에 상륙해서 국기게양까지 가졌다. 그리고 대만 극우들도 이곳으로 배를 타고 돌격하여 일본 극우단체랑 바다에서 쌍욕하고 서로 들이박기까지 하며 일장기를 불태우고 분노하던 적도 있었다.

일본독도 문제로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를 두고 논쟁을 겪을 때 대만에서 "댜오위타이 문제도 같이 회부하자!"라고 주장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대만이 ICJ회부를 실행에 옮겼다면 일본은 ICJ 강제 관할권 조항에 동의한 국가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일방적인 제소에도 무조건 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대만이 ICJ에 회부한 것은 아니다.

현재 대만은 일본과 따로 협정을 맺어 현재 대만의 센카쿠 열도 영유권 주장은 일시 유보한 상태이다. 정확하게는 미국처럼 일본의 행정권까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준 것이고, 주권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센카쿠 열도 영유권 주장에서 정치 진영에 따라 온도차가 있는데, 범람연맹 계열에서는 센카쿠 열도가 대만 땅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편이다. ICJ에 회부하자는 발언도 범람연맹의 중심 정당인 중국국민당이 집권했던 시절 마잉주 당시 총통이 했던 말이다. 반면 범록연맹 계열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센카쿠 열도가 대만 땅이라고 말은 해도 적극적으로 영토 분쟁에 나서지는 않는다. 리덩후이는 아예 센카쿠 열도가 일본의 영토라고 발언해버려서 대만 여야 양쪽에서 까인 적이 있다.

범록연맹 계열의 민주진보당 소속 차이잉원 현임 총통은 당선 직후 "조어대는 중화민국의 영토다"라고 발언한 바 있지만#, 기본적으로 범록연맹 소속이기 때문에 차이잉원 총통 시기에는 영토 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거란 예측도 있다.

하지만 온도차가 어떻든, 중국에 밀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일본마저 적으로 만들어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센카쿠 문제로 일본을 자극하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있다. 물론 일본도 중국 견제를 위해 대만과의 협력은 중요하다. 대만과 일본 양국은 2012년에 대만 어민의 센카쿠 해역 내 조업 허용을 골자로 한 어업협정을 체결한 바 있으며, 일본 내에서는 대만에 너무 많이 양보한 거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만으로부터 센카쿠 관할권을 인정받는 대신 어업권을 내준 셈이다.

2020년 현재 타이완-일본 수역에 대만 해양순방서는 매일 한 척 내지 두 척의 함정을 파견해 순시 근무하고 있으며, 해양순방서 제1순방구주임 홍버성(洪伯昇)은 앞으로도 우리 정부의 어민보호 표준작업 절차에 의거하여 어민 보호 임무를 이행하고 우리나라 주권과 어먼의 어업권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5. 류큐 독립에 대해

만약 류큐의 독립이 성사된다면 태평양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원하는 중국,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대만 등의 국가들이 개입하여 무슨 수를 써서든 오키나와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내외 문제, 특히 중국의 패권 장악 우려 때문에 오키나와 현지인들 간에 독립운동은 영 호응이 시원치 않은 상태로 주로 지역권익 향상이나 자치운동으로의 전환이 대세가 되는 형국이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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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 3세기 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