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 사우디아라비아 | 대만 |
1. 개요
중국, 대만 및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외관계에 대한 문서이다.사우디아라비아는 한 편으로 와하비즘 포교국으로도 알려져 있으나,[1] 중국에 한해서는 와하브파 선교를 포기한 상황이다. 애초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 전략 이슬람주의가 민주주의의 표현의 자유 및 정체성 정치 같은 인권 개념을 악용하면서 교세를 확장하는 개념인데,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고 정체성 정치가 설 자리가 없는 중국에서 와하브파 선교가 설 자리가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987년부로 인쇄해서 배포하는 중국어판 쿠란 번역본도 마젠의 번역본으로 한국 등 다른 국가에 번역 배포되는 버전에 비해 매우 온건한 편이라 한다.
2. 대만과의 관계
여러 면에서 긴밀한 편이다. 1945년 중화민국과 국교를 수립했고, 1949년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옮긴 이후로도 국교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사우디아라비아가 1990년 7월 중국과 수교하며 단교했다.국민당의 유력 군벌이자 후이족이던 마부팡은 생애 말년에 와하브파를 받아들였고,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대만으로 피난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대만으로 망명한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로 파견되어 은퇴한 이후에도 여생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냈다고 한다. 1970년대 대만의 건설 기업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활발하게 진출해 여러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경제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양국의 관계는 어느 정도 우호적이게 되었다. 단교 이전까지는 매년 군사적인 협력까지 할 정도로 가까웠는데 특히 사우디의 지원으로 비밀리에 대만이 자국의 F-5 전투기 및 방공부대 운용 인원을 북예멘에 파견하여 남예멘[2]에 파견되었던 소련군 및 쿠바군을 상대로 전적을 올린 바 있었다.
단교 이후로 양국간 군사교류 등은 중단되었으나 민간 분야에서의 외교는 활발한 편으로, 1990년 단교 직후 상호 대표부를 타이베이와 제다에 각각 설치했으며[3], 2017년에는 주사우디 대만 대표부를 수도인 리야드로 이전하였다. 대만은 40%의 석유를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수입하고 있으며, 2016년 기준으로 사우디의 9번째 수출국이다.
폭스콘은 사우디에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을 세운다고 밝혔다.#
3. 중국과의 관계
2022년 중국 새해인 춘절에 리야드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기념 행사 | 2022년 12월 8일 사우디를 방문한 시진핑 주석 |
강력한 반공 국가인 만큼 1990년까지 대만과 국교를 유지해 왔으나 국제적 추세를 따라 1990년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사우디가 대만과 단교하면서 아시아에 남은 대만의 수교국은 대한민국만 남게 되었으나 대한민국도 2년 후인 1992년에 중국과 수교하면서 아시아에서 대만의 수교국은 전멸하기에 이른다.
201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유가 치킨 게임을 벌이며 주요 석유 수입국인 중국 편으로 돌아섰다.# ## 중국은 사우디의 원유 수출량 중 1/4를 차지한다.
미국에서 오일셰일, 셰일 가스 산업을 육성하여 산유국 입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를 위협하기 시작하고, 2016년 1월부로 오바마 행정부가 사우디의 주적 이란과 핵협상을 시도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교는 반미친중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2014년 국제 유가 폭락의 주범으로 지목받아 여타 산유국(주로 이웃나라들)로부터 욕이란 욕은 다 먹었는데도 불구, 이를 주도했던 오바마 정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이벌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줄이는 식으로2016년 1월 기사 사우디 측에 뒤통수를 거하게 날렸다.[4] 자말 카쇼기 암살 사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그렇게 티격태격했던 것도 카쇼기라는 언론인이 그렇게 대단하고 중요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5] 사우디아라비아 측의 대가 요구를 거부하겠다는 제스쳐를 표현한 차원에 가까웠다. 즉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가까워지는 이유는 서방 언론에서 지적하는 바대로 중국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이나 민주화, 예멘 전쟁범죄 문제를 묵인해서도 있겠지만, 사우디가 미국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 문제가 더 크다.#
사우디의 살만 국왕이 탈석유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도중에 일본과는 경제협력을 하기로 결정했고, 중국방문을 하면서 유대를 강화할 방침을 보이고 있다. # 그리고 중국은 사우디와 함께 200억달러규모의 대규모 공동펀드를 만들면서 미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 2019년 2월 22일에 중국을 방문중인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는 시진핑과 회담하면서 중국과 석유단지를 합작하겠다고 밝혔고, 중국과 31조원의 경제협약을 체결했다. # # 중국 국부펀드가 최대 11조원 규모의 아람코 주식을 매입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우디가 중국의 지원 아래 우라늄염 추출 시설을 건설함으로써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장 재교육 캠프 관련해서 심지어 전통적인 친중 외교 노선으로 유명한 이란조차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정권은 신장 재교육 캠프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교화하는 정책이라고 두둔하는 상황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위구르인과 홍콩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합법적인 입장을 지지한다고 발언했다.#
물론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이슈는 사우디아라비아 민간 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야기하는 이슈이다.[6] 특히 성지순례를 온 위구르인들을 납치해서 마치 중국에서 탈북자를 북한으로 강제송환하는 방식으로 중국 수용소로 압송시킨 사건은 이슬람권 성지순례 역사에 전례가 없던 일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수준으로 중국과 이슬람권의 전면 대결 양상으로는 번지지 않는데, 위구르 인권 탄압 문제가 중국과 이슬람권 국가 사이의 국민 감정을 악화시킬 수는 있지만, 대외 정책을 무조건 국민 감정에 기반해서 짤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과거 같았으면 아랍 국가 정부에서 팔레스타인 대신 이스라엘 편을 들거나 하는 식으로 국민 감정을 자극하면 대대적인 시위가 터졌겠지만,[7] 2010년도 이후 아랍의 봄 실패 및 가자지구와 시리아에 계속되는 전쟁, ISIS 문제 등으로 이슬람권 내에서는 자국 정부가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고 위구르 인권 문제를 무시하건말건 우리는 모르겠다 식의 체념이 만연해있다.
알자지라 등 아랍권 언론에서 위구르 인권 탄압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우디를 위시한 아랍 국가 수반들은 신장 재교육 캠프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2022년 10월에 유엔의 신장 인권문제에 대한 의장 성명에서도 이슬람국가로는 유일하게 튀르키예만 참가했고, 사우디, 이집트, 이란, 이라크, 인도네시아 같은 주요 이슬람 국가들은 빠졌다.#[8]
사우디가 중국의 지원으로 탄도미사일을 제조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2022년 1월 10일에 휴먼라이트워치는 사우디가 위구르족 2명을 중국으로 송환을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사우디가 시진핑 주석을 초청하며 중국과의 관계를 더욱 증진한다고 한다. #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대 이란과의 핵협상에 반발해 원유결제를 달러 대신 위안화로 하는 것을 중국 정부와 협의 중이라고 한다.#
중국의 일대일로로 참여한다.#
중국의 이동통신 CMI가 사우디의 디지털 미디어 국책사업에 진출했다.#
12월 7일, 사우디 국영통신이 시진핑 주석이 살만 국왕의 초청으로 사우디를 방문한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시진핑 주석이 방문하자 빈살만 왕세자가 환대했다.# 시진핑 주석의 전용기가 사우디 영공에 진입하자 4대의 전투기가 호위하였고, 리야드에 근접하자 6대의 호위기가 동반 비행하는 등 바이든의 방문 때#와 대비되는 극진한 대우를 하고 있다. 시진핑은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원유 거래에서 달러 대신 위안화를 사용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12월 11일, 사우디는 중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2023년 1월 30일, 천강 외교부장은 사우디와의 제휴를 강화하고 걸프 국가들과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7월 2일, 홍콩을 방문중인 사우디 디지털 인프라 담당장관이 사우디는 중국 본토로 가는 길의 다리로 삼기 위해 홍콩과의 정보통신기술 협력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4. 중국 무슬림들의 성지순례
현대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 지방을 중심으로 건국된 나라이다. 이 히자즈 지방은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하는 지방으로 생산력 자체는 사막 지대가 높지 않지만 대신에 무슬림들이 일생에 한 번 방문할 의무가 있는 핫지(성지순례) 장소로서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무슬림들은 쿠란을 암송하면서 배운 고전 아랍어를 가지고 서로 기초적인 의사 소통을 하게 된다. 메카로 향하는 성지순례는 중국인 무슬림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당나라 때부터 원나라 때까지 중국에 정착한 무슬림들은(이른바 후이족) 상당수가 해상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고 이들 입장에서 메카와 메디나를 성지순례하는 것은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으나, 명나라 때 중국과 중동을 잇는 뱃길이 제한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화남 지방 해안 지대의 무슬림들은 급속히 한족과 동화되었고 명나라, 청나라 때 후이족 무슬림 인구는 주로 서북 내륙 지방에 밀집되어 거주하게 되었다. 원나라 때까지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대개 부유한 무역상이었다면 명나라, 청나라의 무슬림들은 대개 가난한 농부였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무슬림들이 성지순례를 가는 것이 매우 힘들어졌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이후 후이족 사회에서는 한 번 성지순례를 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아훈드(阿訇)라는 경칭이 붙을 정도였다.[9]
성지순례는 원칙적으로는 무슬림의 다섯가지 의무 중 하나이고, 18세기 중반 타림 분지를 병합한 청나라 조정 역시 위구르인들의 해외 이동을 제한하되 성지순례 하나만큼은 막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국민당 정권에서는 위구르인들을 악랄하게 탄압하면서 위구르인 유력자들의 성지순례까지 모조리 금지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친중 성향 무슬림들까지 우르르 다 들고 일어났었다.
오늘날 중국의 무슬림 인구는 후이족과 위구르인 포함 2천만여 명이고 중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로 성지순례를 가는 인원은 매년 1만 명에 달한다. 아무리 국가무신론 정책을 밀어부치는 중국이라 하더라도 성지순례를 완전히 금지하기는 어렵다. 다만 후이족의 경우 성지순례가 그닥 어렵지 않은 것에 비해서 위구르인들이 성지순례를 갈 허락을 받는 것이 다소 어렵다고 한다. 신장 재교육 캠프 설치 전후로 위구르인들이 핫지를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대만의 경우 대만 내 후이족들은 사실상 일반적인 한족 대만인과 별 차이가 없어진 수준이고,[10] 대만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성지순례를 가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인도네시아계 대만인들이라고 한다.[11]
2020년부로 중국 정부에서 개인이 성지순례를 가는 것을 제한하였으나, 이미 코로나 19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성지순례 인원을 대폭 축소한 상황이고, 중국 정부의 개인 성지순례 제한 조치는 그냥 상징적인 의미로 발표한 조치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5. 관련 기사
6. 관련 문서
[1] 서구권 국가들의 경우 대놓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욕은 못하지만 대신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는 학자들 중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이 아닌 경우에는 거의 무조건 위험인물이라고 입국금지 딱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하지만 확실하게 항의하는 편이다.[2] 통일 이전에는 친소 공산국가였다.[3] 정확히 말하자면 설치했다기보다는 기존의 대사관 건물에서 대사관 현판을 떼고 타이베이 대표부 현판으로 교체했다.[4] 참고로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 심지어 이스라엘하고도 손을 잡는 마당이다.[5] 카쇼기는 친 무슬림 형제단 성향의 이슬람주의자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입장에서 그렇게 막 달가운 사람까지는 아니었다.[6] 알자지라 등 아랍권 언론에서도 신장 재교육 캠프 관련 뉴스를 디테일하게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7] 무함마드 빈 살만의 집권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사이 관계가 급격히 우호적으로 변하는 것과도 비교 가능하다. 무함마드 빈 살만 집권 이전에는, 와하브파 성직자들이 이스라엘을 계속 적그리스도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우호 관계는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8]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 역시 중국을 강력 규탄하는 대신, 위구르인들을 중국인들과 동등한 국민으로 대우해달라 요구하는 수준에 그쳤다.#[9] 전근대 메카는 오늘날의 예루살렘과 비슷하게 다양한 종파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모여있는 곳이었고, 메카와 메디나를 방문하고 예멘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청나라의 후이족 무슬림 마명심이란 사람이 자신이 중동에서 배워온 특수한 수피 종파를 포교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성지순례를 한 번 하고 돌아오면 하루아침에 해외 새로운 종파를 포교해도 될 만큼의 권위가 생겼다는 뜻이다.[10] 대표적으로 후이족 군벌 바이충시의 아들 바이센융이 불교로 개종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여담으로 바이충시는 작전지역에서 절과 도교 사원을 마구 부시던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대만에서 아들이 불교로 개종했다.[11] 비교하자면 한국에서도 핫지가는 사람들 중에 한국인보다는 외국인 이주노동자 혹은 귀화인 비율이 훨씬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