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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6-13 02:10:06

토마스 제롬 허드너

토마스 제롬 허드너 주니어 (Thomas Jerome Hudner Jr. : 1924년 8월 31일~2017년 11월 13일)

1. 유년 시절

토마스 허드너 주니어는 1924년 8월 31일 매사추세츠주의 항구도시 폴 리버(Fall Riv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아버지 토마스 허드너 시니어(Thomas Hudner Sr.)는 식료품 체인 허드너 마켓을 운영하는 사업을 꾸렸기 때문에 가정 형편은 넉넉했었다. 장남 토마스 허드너 주니어 뒤로 제임스, 리처드, 필립이라는 남동생들이 태어나 4형제가 나란히 성장했다.

허드너 주니어는 1939년에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Phillips Academy)에 입학했다. 허드너 가족은 아카데미에서 1911년에 아버지가 졸업했고 1921년에는 삼촌인 해럴드 허드너가 졸업하는 등 사립학교에 진학시키고 있었다. 장남의 뒤를 따라 1944년에 제임스, 1946년에 리처드, 1954년에 필립이 차례로 필립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외향적인 성격에 스포츠를 좋아하던 토마스는 기숙사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러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학교 육상 팀에서 주장을 맡는가 하면 미식축구 팀, 라크로스 팀, 학급 임원, 학생회 회원, 조교 하우스 카운셀러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2. 경력

일본 해군진주만 기습에 이어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한 뒤, 허드너는 학교장 클로드 퓨즈(Claude Fuess)의 연설을 듣고 군에 입대하기로 마음먹었다. 1943년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에 있는 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46년에 졸업하고 해군 장교가 되었다. 허드너는 마빈 J. 베커, 제임스 스톡데일, 지미 카터, 스탠필드 터너 같은 훗날 이름을 떨친 학우들과 함께 사관학교를 다녔다. 사관생도 톰 허드너는 여기에서도 미식축구 팀에서 뛰었고, 결국 주니어 대표팀의 러닝백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소위로 임관했을 때는 전쟁은 이미 끝난 뒤였다.

졸업 후 통신장교로 함상 근무를 하게 된 허드너는 군 복무 초기 몇 년 동안 비행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3번함인 헬레나(USS Helena)를 타고 1년간 복무한 그는 진주만 해군기지로 파견되어 그곳에서도 통신장교로 근무했다. 수상함만 타던 그가 비행장을 옆에 둔 육상기지에 근무하게 되면서 비로소 항공기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고, 1948년에는 비행학교에 지원했다. 그는 플로리다주 펜사콜라 해군항공 기지로 보내져 기초 비행 훈련을 마쳤고, 텍사스주 코퍼스 크리스티로 옮겨가 고등 비행 과정을 이수했다. 허드너는 중위가 된 후인 1949년 8월에 해군 비행사 자격을 따냈다. 해군 조종사가 된 그는 잠시 레바논에서 중동 파견 근무를 한 뒤, 에식스급 항공모함 레이테(USS Leyte)에 승함해서 F4U 콜세어를 조종하는 제32함상전투비행대(VF-32)에 배치되었다. 그는 콜세어가 성큼 코앞에 다가온 제트 시대에 뒤처진 낡은 비행기임을 알았지만,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임무를 즐기고 있었다.

3. 한반도 파견

1950년 6월 25일 밤, 북한군 10개 사단이 대한민국을 침공했다. T-34 전차와 SU-76M 자주포를 앞세운 인민군 제1파 89,000명 병력은 6열 종대로 진군하며 남한 땅을 짓밟고 삼팔선을 지키던 한국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해며 남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한국군은 병력은 충분했으나 장비와 무기가 부족하고 무능한 지휘관들이 넘쳤으며, 한 마디로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수적, 질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은 남쪽으로 더 밀고 내려가기 전에 고립된 38,000명의 한국군을 격파했다. 북한군은 남침 몇 시간 안에 서울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이승만 정부 수반들과 산산조각난 군대는 수도를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한반도가 공산화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군대 파견을 결의했다. 미 제7함대는 항공모함 밸리 포지(USS Valley Forge)가 이끄는 태스크포스 77(Task Force 77)을 편성하고 영국 극동함대는 콜로서스급 항공모함 트라이엄프(HMS Triumph)를 포함한 여러 척의 군함을 급파해 항공 지원을 시작했다. 해군이 북한을 봉쇄하고 남하하는 인민군을 지연시키기 위해 쉴 새없이 함재기를 띄웠지만, 그것만으로 기세를 탄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이후 지상군에게 항공 지원을 보충하라고 명령했다. 토마스 허드너가 타고 있던 항모 레이테를 포함한 모든 미 해군 부대의 함선들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레이테는 지중해에 있었고, 허드너 또한 극동까지 보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8월 8일에 임무를 교대할 함선이 지중해에 도착하자 레이테에게는 곧바로 한반도로 전속 항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해군 지휘관들은 레이테의 조종사들이 다른 항모 비행대원들 보다 훈련과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VF-32는 극동 전선에 처음 파견된 해군 조종사들 중 하나였다. 레이테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대서양을 건너 쿤셋까지 항해한 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하와이, 일본을 거쳐 10월 8일에 동해에 진입했다.

레이테는 또다른 에식스급 항모인 필리핀 시( USS Philippine Sea)와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USS Missouri), 경순양함 주노(USS Juneau CL-119)를 포함한 미 7함대 소속 17척의 함대로 편입되어 한반도 북동쪽 해안에서 제77기동부대로 편성되었다. 당시 허드너 중위는 20회의 출격 임무를 수행했는데 거기에는 보급 행렬과 통신 선로 공격, 지상군 병력 공습, 원산, 정주, 성진, 신안주 부근의 군사 시설 폭격 등이 포함되었다.

1950년 11월 말에 중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했다. 허드너와 그의 편대는 장진호(長津湖 / Changjin Lake)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는 미군이 주축이 된 10군단(X Corps)과 인민 의용군 제9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거의 10만 명에 달하는 중국군이 15,000명의 미군을 포위했고, 항모 레이테의 콜세어 조종사들은 중국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 수십 회의 근접공중지원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4. 전우를 구하기 위해 불시착

1950년 12월 4일, 허드너는 중국군에게 포위돤 해병대원들을 지원하는 6대의 콜세어 편대와 함께 출동한다. 13시 38분, 그는 편대장 딕 세볼리(Richard L. "Dick" Cevoli : 1921~1955)와 조지 허드슨(George Hudson), 빌 코닉(William H. “Bill” Koenig : 1926~) 준위, 랠프 맥퀸(Ralph E. McQueen) 소위, 그리고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해군 비행사로 선발된 제시 L. 브라운(Jesse L. Brown : 1926~1950) 소위와 함께 날았다. 제시 소위는 부편대장인 허드너의 윙맨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77 기동부대에서 출격한 그들은 혹독한 한반도의 겨울 하늘을 뚫고 160 km 떨어진 장진호로 날아갔고, 임무 지역인 저수지 서쪽의 유담리와 남쪽의 하갈우리 마을 상공을 돌면서 35~40분 동안 초계 비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저수지 서쪽을 따라 지상 목표를 육안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휘날리는 눈보라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 고도를 210m까지 낮추게 된다. 이들이 하달받은 임무는 3시간에 걸친 수색 및 파괴와 함께 해당 지역에서 중국군 병력의 활동을 정찰하라는 것이었다.

비행대원들은 중국군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14시 40분에 코닉 준위가 브라운 소위의 기체에서 연료가 새는 것이 보인다고 무선으로 알려왔다. 아마도 그 피해는 눈 속에 매복한 채로 지나가는 미군기를 향해 소화기로 일제 사격을 가하는 중국군의 대공 사격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한 발의 총알이 연료관 한 군데를 찢었다. 점차 연료 압력을 잃고 더 이상 체공하기 어려워진 제시 브라운 소위는 무거운 보조 연료탱크와 로켓 무장을 떨어뜨린 다음, 눈 덮인 산기슭의 공터에 불시착을 시도했다. 브라운 소위는 중국군 전선에서 15마일 들어간 북위 40도 36도, 북위 127도 06도, 소몽리 부근의 사발처럼 움푹 패인 계곡에 동체 착륙을 하다가 기체가 쪼개지고 날개가 부러졌다. 충돌 후 정신을 차린 브라운 소위가 기체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다리가 부서진 동체 아래에 꽉 물려 고정되어 있는걸 알았고, 그는 헬멧과 장갑을 벗고 머리 위에서 선회하고 있던 동료 조종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처음 허드너와 편대원들은 그가 추락으로 사망했다고 생각했고, 즉시 인근 중국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산을 끼고 돌면서 메이데이 구조신호를 발신했다. 그들은 우군의 구조 헬리콥터가 가능한 빨리 올 것이라는 교신를 받았지만 브라운의 부서진 콜세어는 연기를 내뿜다가 내부 연료탱크에서 불이 나고 있었다.

허드너는 윙맨을 구하기 위해 자산의 기체를 부근의 눈밭에 동체 착륙을 시켰다. 전투기에서 빠져나온 그는 브라운 소위의 곁으로 달려가 잔해에서 빼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다리뼈가 끼고 출혈로 인해 브라운의 상태가 시시각각 악화되자 허드너는 불붙은 전투기에 눈을 퍼다 뿌리며 화재를 진압하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허사였다. 브라운 소위는 심한 고통과 출혈 속에서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허드너 중위에게 어서 몸을 피하라고 했다. 15시경에 구조 헬기가 도착하자 허드너와 헬기 조종사 찰스 워드(Charles Ward) 중위는 소화기 한통을 터뜨렸지만 그래도 엔진으로 옮겨붙은 불을 끌 수 없었다. 그들은 45분 동안 도끼로 잔해를 부수며 브라운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은 브라운 소위의 요청 대로 끼어버린 다리를 절단하는 것을 잠시 고려했지만, 그 당부를 마지막으로 브라운 소위는 의식을 잃었다. 그가 허드너 중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데이지에게 사랑한다고 전해줘"였다. 당시 미군 헬기는 야간비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질녘이 되자 브라운을 남겨두고 허드너와 함께 추락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골절과 정맥 출혈과 함께 영하 30~40도를 밑돌아 극지의 추위를 방불케 하는 함경도의 혹한에 노출된 브라운 소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중국군은 콜세어의 잔해로 접근하려 했지만 함께 날아온 VF-32 조종사들의 격렬한 공습 덕분에 현장에는 다가오지 못했지만, 이윽고 연료가 빙고 수준으로 떨어져 돌아가야만 했다.

모함으로 돌아온 허드너는 브라운을 구출하도록 잔해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상급자들에게 간청했지만, 지휘관들이 추가 사상자를 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전우의 시신과 전투기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 해군은 이틀 후 추락 지점을 네이팜탄으로 폭격했다. 조종사들은 그의 몸이 흐트러지고 비행복 재킷이 벗겨진 것을 목격했으나, 시신은 여전히 조종석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행대원들은 섭씨 1,000도의 시뻘건 불길이 콜세어의 잔해와 브라운의 시신을 집어삼키는 것을 보면서 무전기를 통해 주기도문을 낭독했다. 제시 브라운 소위는 한국전에서 처음 전사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교였다.

12월 4일, 허드너 중위는 착함 도중 허리를 다쳐 한 달 동안 발이 묶였고, 이후 허드너는 6~8년 동안이나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는 항모 레이테가 1951년 1월 20일에 대서양 함대로 복귀할 때까지 27회의 전투 출격을 수행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허드너 중위는 4월 13일에 트루먼 대통령 으로부터 의회 명예 훈장을 받았다. 미국 대통령이 허드너 중위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현장에는 전사한 브라운 소위의 미망인 데이지 브라운(Daisy Brown)도 함께 초대되었다.

5. 후기 해군 경력

명예 훈장을 받은 허드너는 본토로 발령을 받고 1952년과 1953년 동안 텍사스주 코퍼스 크리스티 기지에서 비행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1954년까지 제3항모타격단(Carrier Division 3)의 작전 참모로 근무했다. 1956년까지는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해군 항공기지(Atlantic City NAS)에서 항공 개발 3비행대(Air Development Squadron 3)에서 테스트 파일럿으로 근무하면서 개발되고 있던 최첨단 전투기와 실험용 항공기들을 조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제트 파일럿으로 완전히 숙달되었음은 물론이다.

1957년 10월부터 허드너는 미 공군 교환 프로그램에 참가요원으로 선발되어 매사추세츠주 반스테이블 카운티의 오티스 공군 기지()에 있는 제60전투요격비행단()의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과 2년간 함께 비행하였다. 이 임무 동안 그는 전천후 요격기 F-94 스타파이어와 최신예 초음속 전투기인 F-101 부두를 조종했다. 허드너가 1962년에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있는 맥스웰 공군기지에 있는 공군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해군 항공국장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1963년 7월에 공군대학을 졸업한 그는 제53전대(Fighter Squadron 53)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타이컨더로가(USS Ticonderoga CV-14)에 F-8E 크루세이더 전투기들을 지휘했다. 그후 허드너는 VF-53의 지휘를 하다가 캘리포니아주 코로나도의 노스아일랜드 기지에 있는 해군항공대 사령관의 집무실에서 지도자 훈련 장교로 자리를 옮겼다.

허드너는 1965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텍사스주 비 카운티의 체이스 필드 해군기지에서 훈련부대인 제24비행대(Training Squadron 24)의 지휘를 맡았다. 1966년 그는 처음에는 항해사로, 그 다음에는 배의 행정관으로 항모 키티 호크(USS Kitty Hawk CV-63)에 배치되었다. 키티 호크는 1966년과 1967년 남베트남 해안에 배치되어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68년에 그는 미 해군의 동남아시아 항공 작전부의 작전 장교로 임명되었다. 그 해에 그는 샌디에이고에서 만난 세 명의 자녀를 둔 미망인 조지아 스미스와 결혼했다. 두 사람 슬하에서는 1971년에 아들 토머스 제롬 허드너 3세(Thomas Jerome Hudner III)가 태어났다. 허드너는 1973년 2월에 군에서 은퇴할 때까지 워싱턴 D.C. 해군 작전 책임자의 사무실에서 항공기술 담당관으로 근무했다.

1973년 2월 17일, 허드너가 퇴역하기 며칠 전, 해군은 녹스급 호위함인 제시 L. 브라운(USS Jesse L. Brown)을 취역시켰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열린 취역식에는 재혼한 데이지 브라운과 딸 파멜라 브라운, 허드너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