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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21 15:43:31

토머스 드 코트니(제6대 데번 백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6대 데번 백작
토머스 드 코트니
Thomas de Courtenay, 6th Earl of Devon
성명 토머스 드 코트니
Thomas de Courtenay
출생 1432년
잉글랜드 왕국 데번
사망 1461년 4월 3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
아버지 제5대 데번 백작 토머스 드 코트니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
형제 헨리, , 조앤, 엘리자베스, 아그네스
배우자 멘의 마리
직위 제6대 데번 백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다가 토우턴 전투에서 생포된 뒤 처형당했다.

2. 생애

아버지는 제5대 데번 백작 토머스 드 코트니이고, 어머니는 초대 서머싯 백작 존 보퍼트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마거릿 홀랜드의 딸인 마거릿 보퍼트이다. 형제로 헨리와 이 있었으며, 누이로 조앤, 엘리자베스, 아그네스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초대 본빌 남작 윌리엄 본빌과 영지를 놓고 격렬한 무장 투쟁을 벌일 때 형제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장미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아버지와 함께 랭커스터 왕조에 가담했다.

1458년 2월 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모든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1460년, 요크군은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을 격파하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그 후 열린 의회는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를 왕위 계씅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르그리트는 헨리 6세와 자신의 외아들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고, 충성스러운 영주들에게 군대를 모아 요크셔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즉시 이에 호응하여 1460년 12월 북상했고,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군을 섬멸하고 요크 공작 리처드를 처단하는 데 일조했다. 이때 본빌 남작 윌리엄 본밀의 아들과 손자가 살해되었다.

그 후 랭커스터군이 런던으로 남하할 때 동행했고, 1461년 2월 17일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이 전투에서 본빌 남작 윌리엄 본빌이 생포되었고,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는 다음 날 별다른 재판도 없이 토머스 키리엘과 윌리엄 본빌을 처형했다. 많은 학자들은 토머스 드 코트니가 영지 경쟁자를 없애버리기 위해 윌리엄 본빌 처형을 부추겼다고 추정한다.

그 후 랭커스터군은 민심이 매우 적대적인 런던으로 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장남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이를 틈타 런던에 입성한 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를 칭했다. 그 후 에드워드 4세는 군대를 끌어모은 후 북상했고, 양자는 1431년 3월 29일에 토우턴 전투를 치렀다. 랭커스터군은 참패했고, 토머스 드 코트니는 생포된 뒤 4월 3일 요크에서 참수되었다.

토머스 드 코트니는 1456년 9월 9일 멘 백작 샤를 4세 뒤 멘사생아이자 앙주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사촌인 마리 드 멘과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녀를 낳지 못했고, 토머스의 재산과 작위는 1461년 11월에 통과된 의회 특별법에 의회 몰수된 뒤 에드워드 4세의 측근인 험프리 스태퍼드에게 돌아갔다. 동생 헨리 드 코트니는 1466년 에드워드 4세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솔즈베리 시장에서 참수되었다. 1469년 험프리 스태퍼드 에드워드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레데스데일의 로빈의 무리에게 패배해 처형되면서, 막내 동생 존 드 코트니가 영지와 작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존은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전사했고, 코트니 가문은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