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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18 21:05:32

험프리 스태퍼드(데번 백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데번 백작
험프리 스태퍼드
Humphrey Stafford, 1st Earl of Devon
성명 험프리 스태퍼드
Humphrey Stafford
출생 1439년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사우스윅
사망 1469년 8월 17일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 브리지워터
아버지 윌리엄 스태퍼드
어머니 캐서린 차디옥
배우자 이사벨라 바레
직위 사우스윅의 스태퍼드 남작, 데번 백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요크 왕조의 추종자로서 랭커스터 왕조에 대적했다.

2. 생애

험프리가 속한 가문은 스태퍼드 백작 및 버킹엄 공작이 된 가문의 방계이며 도싯의 후크와 윌트셔의 사우스윅에 자리를 잡은 귀족 집안이었다. 조부 험프리 스태퍼드는 의수를 착용했기에 '은빛 손을 가진 자'로 일컬어진 인물로, 헨리 4세가 각지의 반란을 진압할 때 참여했고, 스코틀랜드 전선과 오와인 글린두르가 이끄는 웨일스 반란군과의 교전에서공적을 세운 뒤 왕실의 총애를 얻어 상당한 토지와 재산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스태퍼드셔와 도싯 의원으로 활약했다. 아버지 윌리엄 스태퍼드는 1450년 잭 케이드의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어머니 캐서린 차디옥은 잉글랜드 남서부 지역의 주요 지주였던 존 차디옥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험프리는 친가와 외가의 재산을 합쳐서 도싯에서 가장 큰 영지 소유자가 되었고,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주로도 거듭났다. 1450년대 후반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의 아들인 윌트셔 백작 존 스태퍼드를 섬겼다. 1460년 제5대 오들리 남작 존 투셰와 함께 칼레의 요크파 군대에 대적하는 기옌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항해했지만 악천후로 인해 칼레 항구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대표적인 요크파 인사이자 칼레 수비대 지휘관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회유를 받아들여 요크 가문에 가담했다. 1461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마치 백작 에드워드의 승리에 기여했고,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 참전해 요크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한 후 에드워드 4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1461년 7월 26일, 험프리는 사우스윅의 스태퍼드 남작으로 처음으로 의회에 소환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4세는 수년간 그에게 많은 영지와 직위를 부여했다. 험프리는 1461년 콘월 공국의 관리자이자 브리스톨의 보안관이 되었고, 1462년에는 토우턴 전투에서 생포된 후 처형된 제6대 데번 백작 토머스 코트니의 데번 영지 대부분을 받았다. 1464년 다트무어의 관리인에 선임되었고, 1467년 코트니 가문이 보유했다가 왕실에 몰수된 여러 영지를 더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에드워드 4세의 이익을 대변해, 랭커스터 왕조를 여전히 지지하는 백성들을 억누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460년대 내내 이지역 전역의 법원을 주재해, 요크 왕조에 대적할 기미가 보이는 자들을 엄중히 처벌했다. 1461~1462년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군대에 복무했고, 1468년에는 브르타뉴 공국과의 협상에 참여했으며, 1469년 왕립 위원회에 참여했다. 1469년 5월 17일, 그는 마침내 에드워드 4세로부터 데번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렇듯 험프리의 위상이 급격히 떠오르며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자, 기존에 요크 왕조의 실권자였던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불만을 품었다. 두 사람은 1468년 공개적으로 갈등을 벌였다가 나중에 화해했지만, 1469년 다시 다퉜다. 리처드 네빌은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과 함께 에드워드 4세를 타도하기 위해 요크셔에서 레데스데일의 로빈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했다. 에드워드4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런던에서 북상했고, 험프리는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와 함께 군대를 모아서 반란군 진압에 합류하려 했다.

이후의 전개 상황은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서 알기 어렵다. 연대기 작가 워크워스에 따르면, 데번 백작과 펨브로크 백작은 서로 다퉜고, 데번 백작은 궁수 대부분을 데리고 떠났다고 한다. 1469년 7월 26일 에지코트 전투에서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가 반란군과 단독으로 맞서다가 전사했고, 험프리 스태퍼드는 너무 늦게 전장에 도착했다가 역시 패했다고 한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드 보랭에 따르면, 험프리는 워릭 백작이 반군과 합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주했다고 한다.

에지코트 전투에서 토벌대가 반란군에게 격파된뒤, 펨브로크 백작은 에지코트 현장에서 체포된 뒤 워릭 백작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험프리 스태퍼드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1469년 8월 17일 서머셋 브리지워터에서 그를 알아본 폭도들에 의해 참수당했다. 그는 생전에 헤리퍼드셔의 존 바레 경의 딸 이사벨라 바레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고, 자연히 그가 가진 영지는 왕에게 돌아왔다가 1년 후 제5대 데번 백작 토머스 코트니의 아들이자 제6대 데번 백작 토머스 코트니의 동생인 존 드 코트니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