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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18:41:10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영국 제41·43·45·47대 총리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남작
Thomas Babington Macaulay
FRS FRSE PC
파일:1000016282.jpg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출생1800년 10월 25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로틀리
사망1859년 12월 28일 (향년 59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케임브리지
경력 1830년 하원의원
1834년 인도총독고문
1838년 윌리엄 램 내각 육군장관
1846년 존 러셀 내각 재무부 경리장관
1849년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
서명파일: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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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부모부 재커리 맥컬리
모 셀리나 밀스
형제자매 한나 모어 매컬리
마가렛 맥컬리
찰스 재커리 맥컬리
헨리 윌리엄 맥컬리 등 총 8명
학력트리니티 대학교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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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저서4. 저술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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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인들은 패배, 굴복, 치욕을 모르는 국가의 국민이며 국민을 위협하는 자에게 귀를 의심할 정도의 배상금을 받아온 국가의 국민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털 한 올이라도 상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처벌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편전쟁 찬반투표 하루전 영국 의회 연설에서,
1879년 4월 9일

토머스 매콜리는 영국의 시인, 역사가, 정치가이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법률을 연구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여 1830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의회지상주의를 제창한 휘그당의 의원로서 선거법 개정에 노력하였으며, 34년 인도총독고문으로서 영어 공용어 제정 및 교육 실시, 인도 형법전 작성 등 인도 통치 역사상 중요한 제언을 하였다. 또한 그는 평론가이자 수필가로서 사회정치 주제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 특히 그의 대표저서 그의 <영국사(History of England)>는 휘그사관[1]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있다.

2. 생애

영국 정치가ㆍ수필가ㆍ시인ㆍ역사가. 잉글랜드 레스터셔 로틀리템플 출생. 레스터셔에 있던 아저씨의 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헤브리디스 제도 출신의 장로회 목사였고 아버지 재커리 매콜리는 시에라리온 총독을 지냈다. 열렬한 박애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싸운 윌리엄 윌버포스의 친구였으며 철저히 복음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퀘이커교의 신자인 어머니는 브리스틀의 서점주인 딸이었다. 그는 9형제 가운데 맏이었으며 가족들에게 헌신했고 특히 두 누이동생 해나와 마거릿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8세 때 세계사 개론을 썼고 월터 스콧 경의 시풍을 본떠 낭만적인 서사시 <체비엇 전투(The Battle of Cheviot)>를 썼다. 사립학교에서 공부한 뒤 181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다. 1831년까지 이곳의 특별연구원으로 남아 있었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다정한 성격과 지칠 줄 모르는 언변으로 신망을 얻었다. 1825년 밀턴에 관해 쓴 최초의 평론이 [에든버러 리뷰(The Edinburgh Review)]에 실리자 유명해졌고, 더욱 넓은 무대에서 자신의 사회적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으며, 그 시대 거의 모든 뛰어난 인사들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았다.
법률을 공부해 1826년 변호사가 되었으나 본격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 그는 저술과 강의로 가족을 부양했고 사소한 공직을 맡았다. 정계 진출을 꿈꾸며 1830년 윌트셔의 칸 대표로 하원의원이 되었다. 선거법 개정안(1832)의 통과에 앞서 열린 토론에서 유창한 연설로 의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그는 그 시대 여러 위대한 웅변가들 가운데 지도적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동인도회사의 인도 통치를 감독하던 인도 통치부에 들어갔으며 나중에 그곳의 장관이 되었다. 낮에는 인도 업무를 보고 저녁에는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에든버러 리뷰]에 기고한 8편의 문학·역사 평론을 비롯해 발라드 <아르마다(The Armada)>를 썼다. 1834년 무렵 새로 생긴 인도 최고위원회에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자 자신의 봉급으로 평생먹고 살 충분한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 믿고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누이 해나를 데리고 인도에 도착했는데 이때는 동인도회사의 효율적인 통치가 영국 왕실의 통치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였다. 1838년 영국으로 돌아와 에든버러 대표로 의회에 들어갔다. 1839년 멜버른 경 내각의 육군장관이 되었으나 1841년 내각이 무너지자 틈을 내어 <고대 로마의 담시(Lays of Ancient Rome)>(1842)와 평론집 <비평적 역사평론(Critical and Historical Essays)>(1843)을 펴냈다. 1846년 존 러셀 경이 총리직에 오르자 재무부 경리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846~47년의 의회 회기에서는 5차례밖에 연설을 하지 않았다. 1847년 지역이해를 소홀히 했던 까닭에 에든버러에서 낙선했고, 정치에 흥미를 잃은 그는 구원받은 심정이 되어 개인생활로 돌아와 <영국사(History of England)>의 저술에 몰두했다. 내용과 문체를 끝없이 고치면서 천천히 집필했다. 사실을 확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종종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기도 했다. 1849년 첫 2권이 나오자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어 재판을 거듭하며 영국과 미국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1852년 휘그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을 때 각료직을 거절하고 에든버러 대표로 의회에 돌아왔으나, 얼마 뒤 심장병에 걸려 정치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사>의 제3, 4권은 1855년에 발행되어 즉시 리 유포되었다. 처음 책이 나온 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영국에서만 약 14만 권이 팔렸으며 미국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팔렸다. 이 책은 독일어폴란드어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ㆍ출판되었다. 1856년 그는, 1840년부터 살아온 피카딜리의 올버니를 떠나 그때에는 잔디와 나무가 우거져 있던 캠든힐의 홀리로지로 이사했다. 이듬해 로슬리의 매콜리 남작으로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져 상원에서는 한 번도 연설을 못했으며, <영국사>에서 윌리엄 3세 재위기간을 다 쓸 때까지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시인했다. 그는 캠든힐에서 죽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영국사> 제5권은 누이동생이 편집해 1861년 발행했다.

3. 저서

4. 저술한 시

원문 사이트: https://mypoeticside.com/poets/thomas-babington-macaulay-poems
[1] 자유민주주의나 입헌군주제, 개인의 자유, 과학의 진보 등을 강조하는 일종의 역사관[2] Lays of Ancient Rome[3] Critical and Historical Essays[4] History of Eng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