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토머스 우트레드 Thomas Ughtred | |
생몰년도 | 1292년 ~ 1365년 5월 28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스카버러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커턴 | |
아버지 | 로버트 우트레드 | |
어머니 | 스티튼의 엘리자베스 | |
아내 | 마거릿 버든 | |
자녀 | 토머스 우트레드 | |
직위 | 초대 우트레드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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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스코틀랜드군과 프랑스군을 상대했다.2. 생애
1292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스카버러에서 스카버러, 킬른윅 퍼시, 몽크턴 무어에서 토지를 소유한 영주 로버트 우트레드와 스티튼 출신의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319년 6월 8일 요크셔의 신병 모집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319년 10월 44명의 경비병을 지휘해 베릭 공방전에 참여했다. 1320년 10월 6일 요크셔 카운티의 기사로서 의회에 참석했다. 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반란에 맞서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를 도왔고, 1322년 3월 14일 랭커스터 백작의 지지자들을 모두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1319년 스코틀랜드군이 점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피커링 성의 대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3월 인질들을 구출하긱 위해 스코틀랜드로 갔다가 같은 달에 요크셔에 있는 벤텔레 부동산의 후견인 자격을 얻었다. 1324년 6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대의회에 참석한 뒤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28년 4월 14일 오이어 및 터미너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330년과 1331년 요크셔를 대표해 의회에 참석했다.
1331년 잉글랜드의 새로운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에게 부여된 왕실의 연금을 확인했고, 그를 우즈 강과 더웬트 강 사이, 그리고 요크셔의 노스 라이딩에서 스코틀랜드와 평화를 위한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했다. 1332년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에 옹립하기 위한 잉글랜드 귀족들의 계획에 참여했다. 그가 포함된 원정대는 그해 7월 스코틀랜드로 진군했고, 8월 12일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그는 그해 9월 24일 스콘에서 열린 에드워드 발리올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이너윅 남작'의 자격으로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했다. 10월 20일, 에드워드 발리올은 그에게 본킬 영지를 부여했고, 이는 1334년 6월 19일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확인되었다.
1334년 여름, 스코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발리올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발리올이 반란군에게 밀려 퇴각했을 때, 그는 록스버그에서 다리를 끝까지 사수해 발리올의 퇴각을 보장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에게 가서 발리올을 지원하라고 요청했고, 에드워드 3세에 의해 군기를 관리하는 기사로 선임되었다. 1338년 에드워드 3세는 발리올에게 스코틀랜드 귀족 로버트 스튜어트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퍼스의 지배권을 그에게 맡기게 했다. 이후 우트레드는 8월 4일에 평시에 200명, 전시에 800명의 수비대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퍼스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충족되지 않았고, 우트레드는 잉글랜드 정부에 퍼스 수비대장 직위를 해임해줄 것을 청원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남아있아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지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고, 1339년 8월 16일 스코틀랜드군에게 포위된 뒤 항복했다. 잉글랜드에 돌아온 뒤 스코틀랜드인들이 두려워서 항복했다는 비방을 받았지만, 웨스트민서트 의회에서 자신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차분히 설명하면서 지원군을 제때에 보내주지 않은 것에 비판을 퍼부었다. 이에 잉글랜드 정부는 그의 설명이 올바른 것으로 판단하고, 1340년 4월부터 본킬 영지의 연간 수입을 계속 챙기도록 해줬다.
1341년, 우트레드는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3세 다르투아의 원정대에 가담해 생오메르 전투에 참여했다. 1347년 5월 13일 프랑스군에 맞서 복무하도록 재소환되었다. 1352년 6월 14일 요크셔 해안 소장으로 임명되었고, 1360년 4월 16일 에드워드 3세를 돕기 위해 프랑스로 재차 파견되었다. 그는 1344년부터 1364년까지 의회에 소환되었다. 1365년 5월 28일에 사망했고, 요크셔 커턴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노스요크셔주 켁스비의 기사 브라이언 버든의 딸인 마거릿 버든과 결혼해 아들 토머스 우트레드를 낳았다. 아들 토머스는 요크셔에 광대한 부동산을 소유했고, 1376~1377년 로크마벤 성의 순경이었고, 1377년과 1379년에 프랑스에 맞서 복무했고, 1383년 베릭 성 대장을 역임했다. 그의 후손들은 오랜 세월 의회에 소환되지 않으면서 잊혀졌다가 앤서니 우트레드(1478 ~ 1534)가 헨리 8세의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