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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0:38:43

톰 헤이든

시카고 세븐
Chicago Seven
애비 호프먼
Abbie Hoffman)
제리 루빈
(Jerry Rubin)
데이비드 델린저
(David Dellinger)
존 프로인스
(John Froines)
톰 헤이든
(Tom Hayden)
레니 데이비스
(Rennie Davis)
리 와이너
(Lee Weiner)
바비 실*
(Bobby Seale)
* 재판 도중 기소 무효, 이후 후속 재판으로 회부
<colbgcolor=#5f5f5f><colcolor=#fff,#fff> 톰 헤이든
Tom Hayden
파일:Tom_Hayden,_Democratic_Candidate_for_Senate_Crop.jpg
본명 토머스 에밋 헤이든
Thomas Emmet Hayden
출생 1939년 12월 11일
미국 미시간 로얄오크
사망 2016년 10월 23일 (향년 76세)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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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미시간 대학교 (B.A.)
배우자 산드라 케이슨 (1961년 결혼, 1965년 이혼)
제인 폰다 (1973년 결혼, 1990년 이혼)
바브라 윌리엄스 (1993년 결혼)
자녀 2명
종교 가톨릭무종교가톨릭
소속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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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사회운동가 출신 정치인. 미국의 68혁명 및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로, 80~90년대에는 정치가로도 활동하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운동권 정치가로 꼽힌다.

2. 생애

1939년, 아일랜드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반골 기질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무종교인이 되었다. 청소년 시기에는 고등학교 신문에서 활동했는데 신문에 욕설과 극좌적 신념을 넣은 혐의로 인해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한 후, 당시 미국을 휩쓸던 반 인종주의 운동에 경도되어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회의(SDS)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는 활발한 활동으로 얼마 안가 SDS의 미시간 대학교 지부의 주요 간부직에 올라섰고 여러 반인종주의 캠페인을 진행해 유명인이 되었다.

1962년, "포트 휴런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은 68혁명의 시발점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듬해 그는 SDS의 전국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미국 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북베트남에 방문하는 등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열을 올리게 되었다. 또한 상원의원 로버트 F. 케네디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아 주류 정치계에서도 주목하는 주요 "운동권 인사"로 분류되었다.

1968년 시위 당시 그는 로버트 F. 케네디를 지지하는 캠페인을 조직하나, 케네디가 사망한 이후 조지 맥거번 지지로 방향을 전환했다.[1] 헤이든은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시카고에서 주전파 휴버트 험프리의 후보 지명 반대를 위한 시위를 조직하였으나,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곧바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그는 시카고에서의 폭동을 조직한 주요한 혐의자로 애비 호프먼 등과 함께 "시카고 에잇"의 일원으로 기소되었다.[2] 그러나 법무부는 이들의 혐의를 결정적으로 구성하는데 실패하였고 헤이든은 법정 모독죄 등의 가벼운 죄만 유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왔다.

그는 70년대 내내 반베트남전 운동에 힘을 쏟았으며, 1973년 유명 여배우이자 그와 마찬가지로 반전좌파 운동을 지지했던 제인 폰다와 결혼했다. 다만 폰다의 유명한 북베트남 방문 당시에는 함께하지 않았다. 베트남전 종전 이후에는 주류 정치권에 관심을 보였고 1976년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이미지는 거의 공산주의자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선이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놀랍게도 2위를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또한 그가 지지하는 50여명의 극좌파 후보자들이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당선되며 헤이든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노선을 온건화해 주류 민주당의 성향과 비슷해지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는 몇차례에 걸쳐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2000년 은퇴하였다. 199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1997년 로스엔젤레스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두번 모두 낙선하였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를 지지하고, 68혁명과 관련해 중요한 인터뷰를 남기는 등의 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2016년 대선 때는 민주당의 대의원 중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버니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았고, 힐러리 클린턴이 충분히 좌익적이라고 생각해 클린턴을 지지했다고 밝혔다.[3] 다만 정치적인 성향보다도 클린턴과의 친분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4] 그러나 얼마 가지 않은 2016년 10월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2 캘리포니아 주의회
하원 의원 선거
제44번 선거구
(로스앤젤레스)


당선 (1위) 초선
1984 재선
1986 3선
1988 4선
1990 5선
1992 캘리포니아 주의회
상원 의원 선거
제23번 선거구
(로스앤젤레스)
198,425 (55.89%) 초선
1996 172,295 (56.20%) 재선
1997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 로스앤젤레스

[[무소속(정치)|
무당파
]]
140,648 (34.49%) 낙선 (2위)

4. 여담



[1] 그는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 당시 관을 운구했다. 정작 당시 운동권은 대부분 케네디가 아니라 유진 매카시를 지지했다.[2] 이후 바비 실의 기소가 무효화되면서 "시카고 세븐"이 되었다.[3] 때문에 샌더스를 지지하던 기류가 강했던 미국 청년층 및 인터넷에서는 그가 노망이 났다고 씹는 여론이 주를 이뤘다.[4] 빌 클린턴이 197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했던만큼, 헤이든은 클린턴이 유명하기 이전부터 그들과 개인적인 친구 관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