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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툰샤오 사 사건(吞霄[1]社事變)은 동녕 왕국(명정)이 청에게 멸망하고 청의 한족들이 대만에 건너오자 사록사 전투 다음으로 벌어진 한족과 원주민 간의 전쟁이며 1699년에 대만 중부에서 한족 황신의 폭정과 잔혹행위에 분노하여 모인 평포족(平埔族) 동맹 연합이 이에 청에 대항하기 위해 반군을 만들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2. 상세
청나라 광서(光緒) 19년(1893년) 먀오리 현 연대기 "병선(兵燹)"의 기록에 따르면 청의 총지배인인 황신(黃申)은 퉁샤오진(通霄鎮) 지역에서 무역을 수행했으며 원주민들에게 사슴을 잡으러 사슴 농장에 가기 전에는 돈과 쌀을 먼저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원주민들은 청의 관리에 점점 불만을 품은 채 견디지 못하고 있다 청나라 강희제 38년(1699) 2월, 타오카스족(道卡斯族)의 3명의 원주민 지방 관리들인 주오 지에(卓介), 주오 우(卓霧), 야셍(亞生)이 반란을 일으켜 황신과 그의 동료 수십명을 죽이면서 청에 대항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청의 총사령관인 장옥기(張玉麒)와 대만의 복건지부인 왕지린(王之麟)은 이 소식을 듣고 이들에게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원주민들이 지역을 포위하고 있었기에 들어가는데 실패하며 남부 지역 여기저기서 지역 관리와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던 중 한 한족이 헌계(獻計)한테 파제흐족(巴宰族) 안의 세력인 안리사(岸裡社) 부족은 용감하고 강하며 숲과 강을 자유롭게 건널 수 있기에 반란의 주모자들이자 지도자들인 주오 지에, 주오 우, 야셍을 잡기 위해선 그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자 청나라는 아직 당시에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안리사 부족과의 동맹을 맺기 위한 목적으로 안리사의 족장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곳에 번역가를 파견하고 사자가 부족에게 설탕, 담배, 천, 은을 선물하자 안리사 부족은 기뻐하며 청나라를 돕기로 한다. 그렇게 청과 동맹을 맺은 안리사 부족들은 원주민 반군이 있는 산을 우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청군은 바다에서 내륙을 공격한 다음, 양측에서 공격하여 원주민 관리들을 사로잡아 원주민 반군들을 토벌했다. 이후 3명의 원주민 관리 주오 지에, 주오 우, 야셍은 안리사 부족에 의해 체포되어 끌려가 청에게 넘겨졌고 그들은 그렇게 참수되었다. 당시 청군과 원주민 반군의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청나라 군대가 다른 평포족 부족인 안리사 부족과 연합하여 원주민 반군을 무찌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또한 안리사 부족은 전투가 끝난 후, 한족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로 지냈으며 이후 옹정제 때 벌어진 대갑서사항청사건에도 한족에게 도움을 줘 다두 왕국이 멸망하게 하는데 기여를 한다.
3. 관련 문서
[1] 퉁샤오(通霄)의 옛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