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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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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학원에서의 특차3. 여담

1. 개요

특차(特次)는 특차 선발 전형의 약자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처음 실시된 1994학년도부터 2001학년도까지 실시했던 한국의 대학입시 제도이다. 수능이 끝나고 수시 모집[1]정시 모집 사이에 수능 고득점자들을 미리 유치하기 위해 내신은 거의 보지 않고 수능만 반영한 제도이다. 이는 수능 위주라는 점에서 정시모집과 유사하나, 당시 기준으로 학생부 성적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정시보다도 더욱 극단적으로 수능의 비중이 높았던 제도였다.

본고사가 존재했던 1994학년도부터 1996학년도까지는 본고사를 치르지 않고 수능 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으나[2], 본고사가 폐지된 1997학년도부터는 수능 외에도 내신이나 논술, 면접 등의 전형 요소를 가미하는 정시 모집에 앞서 수능 점수가 우수한 학생을 먼저 선발하기 위한 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당시 기준으로도 수능 위주였던 정시보다도 더욱 수능의 비중이 높아 수능 100%, 혹은 논술이나 면접 없이 형식적으로 지극히 적은 비중의 내신만을 부가하는 전형을 시행하여 실질적으로 수능만으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합격하면 정시에 지원할 수 없고, 그 학교에 등록을 하든가, 입학 포기하고 재수하든가 양자택일 해야 하는 것은 현재의 수시와 같다.

정원의 일부만을 수능만으로 뽑는 제도인지라, 서울대학교 같은 곳의 특차모집은 그야말로 수능 굇수들의 향연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3] 따라서 법학부나 의예과 같은 서울대 인기학과의 경우 전국 몇 십 등 하는 사람도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을 정도로 수능 굇수들이 즐비해 있었다. 물론 이러한 경우 정시로 다시 원서를 넣어 가면 되긴 했지만, 내신이나 면접 등 수능외적 요소의 비중이 커 수능 고득점자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는 과거의 서울대 정시 입시의 특성 및 초고득점자도 특차에 탈락[4]해 버리는 상황이 다음에 이어지는 정시에서의 하향지원 경향을 유도하여 정시 경쟁률이나 커트라인은 당초 예상보다 낮아지는 일도 간혹 있었다.

결국 특차모집은 수능 지상주의와 입시 과열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에 부딪쳐 2002학년도부터 폐지되었다.[5] 비록 제도 자체는 사라졌지만, 현행 정시모집 중 수능 100%의 전형을 시행하는 곳의 경우 과거의 특차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2. 대학원에서의 특차

대학원에서도 학부과정과 마찬가지로 학생을 미리 선발하기 위해 특차 전형이 있다. 여기는 학부 성적 100%로 선발하는게 보통이다.

3. 여담

김태희강동원이 이 전형을 통해 각각 서울대학교 의류학과와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6] 기계공학과에 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 조정석과 헷갈리지 말자 강사 조정식이 특차가 시행되던 마지막해의 수능인 2001수능에서 역대급 물수능의 퍼포먼스로 인해 수능에서 2개를 틀리고도 서울대 법대를 특차로 들어가지 못했다. 참고로 당시 서울대 법대는 만점자도 떨어졌으니 수능 2개씩이나 틀린 사람이 붙었을리가... 참고로 후술하겠지만 내신이 매우 처참해서 만점 맞았어도 서울대 법대는 붙지 못했을 것이다. 수능전 실시된 모의고사에서 3번 연속 만점을 받은 그였기에 고려대 법대를 포기하고 재수를 하여 전국 6등(!!!)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거뒀지만 하필 특차가 폐지되고 내신 성적이 9등급제 기준으로도 8.4라는(...) 바닥이었기 때문에[7] 서울대 법대를 끝내 입학하지 못하고 고려대 법대에 학번만 바꿔달고 다시 입학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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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7학년도부터.[2] 예비고사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도 특차라는 용어가 쓰였으며, 이때도 본고사 없이 예비고사만으로도 갈 수 있는 전형을 말했다. 학력고사 시절에도 특차라는 용어를 썼으나, 이때는 사관학교, 경찰대학, 한국과학기술원특수대학을 말할 때 썼다.[3] 다만, 서울대학교는 1998학년도까지는 특차모집이 없었다.[4] 심지어 특차 마지막해였던 2001학년도(전반적으로 수능이 매우 쉬웠고 만점자가 66명이었다!) 서울대 법대에는 만점자도 탈락하였다. 이 사람은 내신이 2등급이어서 1.5점이 깎였고 제2외국어에서 1점이 깎여서 최종 점수가 만점에서 2.5점 모자란 점수로 당시 커트라인 점수인 -2점에서 0.5점이 모자라 떨어진 것이었다.[5] 또한 이때부터 총점이 폐지되고 등급제가 처음 도입되었다. 또한 정시모집에서도 '가~라' 4개군이 '가~다' 3개 군으로 축소되었으며, 대신 수시 비중이 이때부터 증가하였다.[6] 당시에는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7] 실제로 당시 서울대는 9등급도 아니고 60등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내신 구간을 촘촘하게 나눈데다가, 1999학년도 입시부터는 과학고와 외고 출신 학생의 내신성적을 일반 인문계 학교 출신 학생 성적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높게 쳐 주는 비교내신제까지 폐지되었기 때문에, 서울대를 노리는 최상위권 중학생들은 일부러 특목고 대신 일반고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죽어도 서울대를 가야겠다는 외고 학생들은 극심한 교내 내신 경쟁에 시달리다가 학교를 자퇴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자퇴하면 내신성적 개념 자체가 없어지고 대신 수능 성적에 비례하는 내신등급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고교 2년 졸업 후 카이스트포스텍 진학이라는 대안이 있는 과학고는 그나마 이런 경향이 덜했고, 60등급제는 서울대만 적용하는 지옥 같은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연고대를 목표로 한다면 외고에서 수/우만 받는 수준으로 방어하면서 수능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