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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17:47:01

파트리스 루뭄바

레오폴드빌 콩고 공화국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
Patrice Lumumba
파일:Patrice_Lumumba,_1960.jpg
<colbgcolor=#0039a5><colcolor=#f9d618> 출생 1925년 7월 2일
사망 1961년 1월 17일 (향년 35세)
국적 파일:벨기에 국기.svg 벨기에 (파일:콩고 독립국 국기.svg 벨기에령 콩고, 1925 ~ 1960)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66-1971).svg 레오폴드빌 콩고 (1960 ~ 1961)
배우자 파울리네 오팡고 (1951년 결혼)
자녀 프랑수아 루뭄바 (1951년생) 포함 5명
직위 초대 레오폴드빌 콩고 공화국 총리
임기 1960년 6월 24일 ~ 1960년 9월 5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정치 입문2.3. 독립 운동2.4. 갑작스러운 독립2.5. 군사 개혁과 연쇄적 붕괴2.6. 몰락2.7. 죽음
3. 평가4. 둘러보기

1. 개요

콩고민주공화국총리, 독립운동가.

2. 생애

2.1. 초기 생애

1925년 벨기에령 콩고 카사이 주의 오날루아(Onalu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민족적으로 그는 19세기 후반 아랍 전쟁 중 대규모 반란을 이끌었던 바테텔라(Batetela) 부족에 속했다. 루뭄바의 아버지는 교육 수준이 낮고 변덕스러운 성미로 악명이 높았다.

개신교와 가톨릭 선교소에서 학교를 다녔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내륙을 이리저리 오가며 시간을 보낸 후 대도시 스탠리빌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하급 행정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우체국 서기가 되었다.

식민지 우체국은 그를 레오폴드빌로 연수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독서 취미에 빠져들어 열렬한 독학자가 되었다. 스탠리빌로 돌아온 후에도 도서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으며 독서회나 문화의 밤 행사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2.2. 정치 입문

1954년부터 루뭄바는 정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체국 직원 협회 회장이 되었고, APIC(Association Professionnelle des Indigènes du Congo) 무역 연맹의 지역 지부를 이끌었으며, 벨기에 자유주의 정당들과 연락을 유지했고 스탠리빌의 진보 협회(Association des Évolués) 회장이 되었다. 그는 바쁜 회의 일정 사이에도 '르 크루아 뒤 콩고(Le Croix du Congo)'와 '라 부아 뒤 콩골레(La Voix du Congolais)'와 같은 신문에 정치 분석 기사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일 밤 두세 시간만 자고도 생활할 수 있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 당시 스탠리빌에서 그를 만난 모든 사람은 감명을 받았다. 루뭄바는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열성적이고 정력적이었다. 안경, 나비넥타이, 그리고 아프리카 남성들에게는 드물게 수염을 기른 그는 많은 사람에게 지적이고 매력적인 인상을 주었다.

1955년 보두앵 국왕이 스탠리빌을 방문한 동안, 주지사 정원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루뭄바는 무려 10분 동안 국왕과 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콩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해 온 벨기에 식민주의의 은혜를 일말의 비꼼 없이 칭송하며 어린 국왕 앞에서 원주민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설명했고, 보두앵은 주의 깊게 들으며 질문을 했다. 이 만남에 대한 소문은 스탠리빌 전역에 퍼져 나갔고, 이때부터 루뭄바의 대중적 명성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2.3. 독립 운동

그러나 벨기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루뭄바는 위조와 횡령 혐의로 기소되었다. 12개월의 징역형을 마친 후 그는 킨샤사로 떠났다. 그곳에서 양조업체인 브라콩고(Bracongo)에서 일자리를 얻어 양조장의 상업 이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루뭄바는 열렬한 콩고 국가주의자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업 홍보의 일환으로 하층 노동자들에게 무료 맥주를 나누어주며 "모든 콩고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약속했다. 군중은 식민주의의 역사와 만행, 광산, 도로, 철도에서의 강제 노동, 원주민들에게 가해지는 미묘한 차별과 굴욕을 두려움 없이 비난하는 용감한 지도자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1958년 루뭄바는 콩고민족운동이라는 단체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가나아크라까지 방문한 그와 동료들은 '독립국 가나'를 보면서 '독립국 콩고'의 뜻을 더욱 키웠다.

2.4. 갑작스러운 독립

한편 이 시기 냉전의 양대 축인 미국과 소련 모두 반식민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결국 1960년 6월 30일, 국제 사회로부터의 도덕적 고립을 감당할 수 없었던 벨기에는 벨기에령 콩고를 식민지에서 해방시켰다.

해방 직전 치러진 총선에서 부상한 가장 강력한 세 인물은 조제프 카사부부, 루뭄바, 그리고 촘베(Tshombe)였다. 카사부부는 주요 도시인 레오폴드빌과 서부 지역을, 루뭄바는 스탠리빌과 중부를, 촘베는 엘리자베스빌과 남부를 장악했다. 소규모 정당들은 그 사이에 놓인 시골 지역을 나누어 가졌다.

이 중 루뭄바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지만, 콩고 국가의 통합을 추구했던 그는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대가로 카사부부에게 대통령직을 양보하고 자신은 총리가 되었다.

콩고 제1공화국은 벨기에로부터 잘 발달된 기반 시설을 물려받았다. 1만 4천 킬로미터 이상의 철도와 140킬로미터 이상의 도로가 건설되었고, 40개 이상의 공항 또는 비행장, 100개 이상의 발전소가 있었으며, 현대적인 산업 부문도 있었다. 또한, 일반 보건 의료(원주민을 위한 300개의 병원과 의료시설)와 함께 극도로 높은 식자율(1959년 170만 명의 초등학생)을 누렸다. 이는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비교할 때 실로 놀라운 성과였다.

하지만 독립 당일, 콩고에는 단 16명의 대학 졸업자가 있었다. 그리고 흑인 의사, 기술자, 변호사, 농학자, 경제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2.5. 군사 개혁과 연쇄적 붕괴

콩고 제1공화국이 안정적인 국가로 존재한 기간은 불과 며칠에 불과했다. 7월 5일, 수도 엘리자베트빌 인근의 도시 티스빌(Thysville)에서 수백 명의 원주민 병사들이 백인 병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루뭄바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지나치게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벨기에인 얀센스(Janssens) 장군을 해임하고 빅토르 룬둘라(Victor Lundula)를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자신의 측근인 모부투 세세 세코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군 수뇌부의 아프리카화는 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주저 없이 다음 조치, 즉 장교단의 신속하고 과감한 아프리카화로 나아갔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후보를 직접 지명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하사와 중사들이 하루아침에 소령이나 대령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기 위해, 공안군(Force Publique)은 이제 콩고 국군(Armée Nationale Congolaise, ANC)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상황을 일시적으로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최종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신생 콩고 공화국의 군대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7월 7일, 티스빌을 탈출한 벨기에인들로 가득 찬 기차가 수도에 도착했다. 많은 이들에게 난민들의 이야기는 최악의 악몽마저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굴욕을 겪고, 조롱을 받았으며, 많은 이들이 위협을 느꼈다. 그러나 가장 큰 공포를 일으킨 것은 성폭력에 대한 소문이었다. 당시에도 많은 유럽인들은 흑인 남성의 성욕에 대해 과장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에 퍼진 공황은 즉시 백인들의 대규모 탈출로 이어졌고, 몇 주 안에 약 3만 명의 벨기에인, 즉 약 1만 명의 공무원, 1만 3천 명의 숙련 노동자, 8천 명의 농장주가 나라를 떠났다. 신생 콩고 공화국은 보름만에 군대에 이어서 행정부까지 소멸한 것이다.

결국 7월 9일, 엘리자베스빌에서 이탈리아 영사를 포함한 유럽인 다섯 명이 살해되었다. 이에 벨기에 국방부 장관 아르튀르 질송(Arthur Gilson)은 콩고에 거주하는 벨기에인들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여기며 그날 저녁 군사 개입을 승인했다.

2.6. 몰락

벨기에는 군사 개입으로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그 결정은 오히려 원주민 대중과 반란군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으며 전국적으로 벨기에인들에 대한 폭력이 증가했다.

7월 12일, 이미 자신들로서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긴 루뭄바와 카사부부는 유엔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엔 결의안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의안에는 벨기에의 군사 개입에 대한 비난이 없었다. 그래서 루뭄바와 카사부부는 순진하게도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전보는 러시아로 전송되자마자 CIA에 유출되었다. 그 내용은 워싱턴에서 큰 불안감을 야기했다. 콩고는 중앙아프리카 전체를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무기 생산에 필수적인 원자재를 대량으로 보유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루뭄바는 공산주의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더 가까웠다. 그는 농업이나 산업의 집단화를 지지하지 않았고, 해외의 민간 투자에 더 의존했다. 더욱이 루뭄바는 국제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전부터 루뭄바를 비합리적이며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던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그를 이번 위기에서 가장 큰 위험요소로 여기고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서방 외교관과 정보 요원들은 카사부부 대통령을 회유하며 그에게 루뭄바를 버리라고 권고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8월 8일, 카사이(Kasai) 주 남부가 독립을 선언했다. 카사이는 카탕가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다이아몬드 광산 지역이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 루뭄바는 재편성된 콩고군을 반란을 일으킨 카사이 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돈이 없었고, 두 달 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승진한 장교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총 수천 명의 민간인이 정부군에게 학살당했고, 한 가톨릭 선교회에 대한 공격에서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여 50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는 혐오감을 표명하며 이를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위반 중 하나이며, 집단 학살 범죄의 특징을 지닌다"고 평했다. 루뭄바는 이제 유엔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1960년 9월 5일, 카사부부 대통령은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루뭄바를 총리직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불과 한 시간 뒤, 루뭄바는 카사부부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했다. 루뭄바는 잠정 헌법 51조에 호소했는데, 이 조항은 '오직 의회와 상원만이 법률에 대한 진정한 해석을 제공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결국 의회는 루뭄바를 지지했고, 카사부부 대통령은 엄청난 망신을 당하며 권위에 손상을 입었다.

이 혼란 속에서 1960년 9월 14일, CIA의 승인과 지원으로 루뭄바의 측근이자 육군 참모총장인 모부투 대령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쿠데타를 감행했다. 루뭄바와 카사부부 모두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카사부부는 결국 일종의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었던 반면, 루뭄바는 수도의 자택에 연금되었다.

2.7. 죽음

11월 22일, 유엔 총회 판결이 나왔다. 53개국이 카사부부 대통령을 지지했고, 24개국이 반대했으며, 19개국은 기권했다. 루뭄바는 국제적으로 패배했다.

11월 27일, 심한 폭우가 쏟아지는 틈을 타 루뭄바는 자택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고작 며칠 만에 모부투의 군대가 므웨카(Mweka) 근처에서 상쿠루(Sankuru) 강을 건너려던 루뭄바와 그의 수행원들을 체포했다.

벨기에 정부는 루뭄바의 지지자들이 그를 구출할 수 없도록 그를 라이벌인 모이스 촘베가 지배하는 엘리자베스빌로 보내자고 제안했고, 모부투와 카사부부는 벨기에 정부와의 화해의 제스처로 이를 수락했다.

1962년 1월 17일 오후 4시 50분, 루뭄바와 그의 두 측근을 태운 비행기가 엘리자베스빌에 착륙했다. 촘베와 측근들은 저녁까지 회의한 끝에 루뭄바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오후 9시 30분 경, 루뭄바와 측근들은 촘베의 수하들의 손에 기관총으로 총살당하고 시신은 얕은 구덩이에 묻혔다.

얼마 후, 흔적을 없애기 위해 카탕가 경찰청 부감찰관인 벨기에인 제라르 수에트(Gerard Soete)가 시신들을 파냈다. 수에트는 시신을 조각내고 황산 통에 녹였다. 그는 루뭄바의 위턱에서 금으로 덧씌워진 치아 두 개를 뽑았다.

2022년에 벨기에가 콩고민주공화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그의 금니가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반환됐고# 킨샤사에 안장됐다.#

3. 평가

모든 민족 통합을 주장하던 루뭄바가 죽으면서 콩고는 연이은 콩고 내전과 전쟁으로 인해 막장국가로 전략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콩고인들의 경우 루뭄바가 살아 콩고 민주공화국을 이끌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면서 아직도 루뭄바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콩고민주공화국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대부분 티토처럼 국가를 하나로 묶었을 것이라고 본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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