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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09:41:02

김재엽

올림픽 유도 남자 -60kg 금메달
파일:오륜기(여백X).svg
파일:일본 국기.svg 호소가와 신지
(1984)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재엽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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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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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김재엽
金載燁 | Kim Jae-yup
파일:김재엽교수2.jpg
출생 1963년[1] 5월 17일 ([age(1963-05-17)]세)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명동
(現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가족 아버지 김경윤(金慶潤)[2]
前 배우자 김경순(1965년생)[3]
아들 김관우(1992년생), 딸 김지민(1993년생)[4]
학력 대구남산초등학교 (졸업)
대구중앙중학교 (졸업)
계성고등학교 (졸업)
계명대학교 사범대학 (상업교육학 83 / 학사)
국민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5]
경기대학교 대학원 (경호안전학 / 박사)[6]
소속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과 교수[7]
종목 유도
체급 -60kg
신체 165cm, 60kg

1. 개요2. 선수 경력3. 수상 기록4. 논란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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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유도 선수이자, 現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과 교수이다.

2. 선수 경력

2.1. 1982년

청소년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유도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이 시절 100연승의 대기록을 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

2.2. 1983년

계명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그러나 이 해 열린 모스크바 세계선수권 직전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터지자 대한민국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2.3. 1984년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승전에서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8]에게 누르기 한판 패를 당하면서 은메달을 받았다.[9]

2.4. 1986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2.5. 1987년

서독 에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호소가와 신지와 또 다시 결승전에서 맞붙어 통쾌한 허벅다리 걸기로 한판승을 거두면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2.6. 1988년

파일:88서울올림픽대회·유도 60Kg급 김재엽 선수 금메달.jpg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 출전하지 못할 뻔했으나 후배 윤현[10]의 눈물겨운 양보로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예선 첫경기부터 결승까지 전 경기에서 상대 선수에게 한 점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여유있게 금메달을 받았다. 경기를 앞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1987 세계선수권 우승자 김재엽과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호소가와 신지가 결승전에서 맞붙을 것이다'라고 예상을 했으나, 호소가와가 준결승에서 미국의 무명 선수 케빈 아사노[11]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면서 금메달의 주인공이 손쉽게 판가름이 났다.

결승전 당일이었던 9월 25일이 마침 추석이어서, 시상대에 한복을 입고서 올라가 금메달을 받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12] 그로부터 30년 후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설날에 금메달을 획득한 윤성빈이 큰절을 올렸다.

3.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88 서울 -60kg
은메달 1984 로스앤젤레스 -60kg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7 에센 -60kg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86 서울 -60kg

4. 논란

1988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였으며 지도자[13]의 길을 걸었으나 제자[14] 의 판정 시비로 인한 항의, 유도 파벌에 대한 폭로로 결국 유도계에서 퇴출되었다.

이후 본인에 해명에 의하면 대한유도회 회장을 1995년부터 2013년까지 18년 간 역임하며 대한체육회 회장, 용인대 총장을 역임한 유도계의 권력자 김정행에게 불만을 표출했던 것을 빌미로 유도계에서 퇴출당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5. 기타


[1] 주민등록상 생일은 1964년생이지만, 호적은 1963년생이다. 심지어 뭉쳐야 찬다에서 이만기와 친구라고 밝혔다.[2] 1936년생. 전직 복싱 선수 출신이다.[3] 전직 핸드볼 선수로 1988 서울 올림픽 금메달과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했다. 본인이 유도계에서 제명을 당한 이후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수십억을 사기를 당했다. 이 때문에 빚이 쌓여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이혼했다.[4] 아들은 과거 청소년 대표 축구 선수였고 딸은 뭉쳐야 찬다 경기에 응원을 왔었다.[5] 석사 학위 논문: 88 올림픽 유도 경기 내용 분석 : 남자 선수를 중심으로(1988)[6] 박사 학위 논문: 민간경비원의 역할 스트레스가 직무태도 및 이직의도에 미치는 영향(2010. 2)[7] 2006년 ~[8] 당시 세계랭킹 1위였다.[9] 은메달을 따게 된 이유가 웃픈데 결승전 시작 2시간을 앞두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근처 한인 타운 곰탕집에서 곰탕을 먹었다고 한다. 먹고 나니 식곤증이 와서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뼈 마디마디에 힘이 없어지고 급하게 결승전을 치르다보니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10] 훗날 윤현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했으나 다른 후배의 양보로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다.[11] 원래 일본 국적의 선수였으나 미국으로 귀화했다.[12] 이후 세바퀴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사전에 협의가 없었던 탓에 협찬사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13] 마사회 감독[14] 그의 코치를 받았던 선수가 윤동식추성훈이었다. 이들도 역시 그와 같은 유도 파벌 피해자들이었다. 이후 추성훈이 뭉쳐야 찬다에 용병으로 출연하면서 다시 만났다. 추성훈은 귀화하기 전까지 경쟁 상대들의 실력도 무시할 수 없어 일부 반론이라도 존재하지만, 윤동식은 현역 당시 동체급 세계 최강으로 불렸는데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15] 옛날에도 그렇고 요즘 운동선수들은 너무 운동에만 매진한 나머지 사회물정을 보는 눈이 어두워 귀가 얇아 보증을 서주고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16] 1988 서울 올림픽의 정신으로 뛰겠다는 각오를 담았다고 한다.[17] 유도 선수 훈련 중에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훈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