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18-11-27 10:43:33

페이샤오퉁


파일:나무위키프로젝트.png
이 문서는 나무위키:프로젝트/중국 근현대사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파일:F2005042610015400000.jpg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6기 전국위원회 부주석
한문 费孝通
한국식 독음 비효통
영문 Fei Xiaotong
출생 1910년 11월 2일 청나라 장쑤성 소주부 우장현
사망 2005년 4월 24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런던 정치경제대학 인류학과 졸업
직업 정치가, 인류학자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화민국 시기2.3. 1차 시련: 반우파투쟁 시기2.4. 2차 시련: 문화대혁명 시기2.5. 개혁개방 시기2.6. 말년
3. 저서4. 수상5. 가족 관계6. 참고 문헌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인류학자. 1936년 런던 정치경제대학에 유학 가서 인류학을 전공해 1938년 중국 농민의 삶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39년 원난대학에 부임 후 중일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 농민들의 삶에 대한 현지 탐사를 벌였다. 또한 중국 민주동맹의 일원으로서 장제스와 국민당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사회인류학이 '제국주의 학문'으로 간주되어 폐지되었지만 베이징 중앙민족학원 부원장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반우파 투쟁 시기 우파 분자로 비판받아 하방해야 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게 탄압받았다. 문화대혁명 종식 후 민주동맹 주석으로서 정치 활동을 벌이는 한편 중국 사회인류학 재건에 앞장섰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페이샤오퉁은 1910년 11월 2일 장쑤성 소주부 우장현의 향신(鄕紳)집안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페이푸안(费朴安)은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일본에 유학가서 서양 사상을 접하고 고향에 중학교를 설립했다. 어머니 양렌란(杨纫兰)은 정부 관료의 딸이자 고학력자로 우장현에 보육원을 세워 페이샤오퉁이 이 곳을 다니게 했다. 양렌란의 형제들 중에는 중국 정치가 양첸리, 건축가 양실리우, 중국계 미국인 에니메이터 CY 양, 그리고 엔터프렌더 양시엔이 있다.

페이샤오퉁은 6살에 우장현 제1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진화여학교로 전입했고 1923년에 둥우대 부속 제1고등학교로 편입되었다. 그는 1924년부터 글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2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둥우대학에 진학하여 의예과에서 공부하며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을 주도했다가 퇴학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1930년에 옌징대학 사회학과로 편입되어 열심히 공부한 끝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졸업 후 량수밍(梁漱溟)의 초청을 받아 산둥성 추평현에 가서 농촌건설사업에 참가했다.

1933년, 페이샤오퉁은 칭화대 사회학과 및 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고 2년 만에 졸업하고 중국에서 최초로 사회인류학 석사를 받은 청년 학자가 되었다. 1935년, 그는 옌징대학 사회학과 학생이던 왕통후이(王同惠)와 결혼하고 국비유학 자격을 취득한 뒤 영국으로 유학가기로 했다. 그는 출국 전에 남부 광시성에 가서 현지 조사를 했는데 야오산(瑶山)에서 길을 잃고 방랑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아내 왕통후이는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산길을 달려 나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페이샤오퉁은 출국 준비를 하면서도 우장현 묘항향 개현궁 마을을 방문하고 한 달 넘게 이 마을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1936년 가을, 페이샤오퉁은 영국에 가서 런던 정치경제대학에서 공부해 박사과정을 마치고 우장현의 현지 조사 결과를 토대로 논문을 제출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듬해 <Peasant Life in China(중국의 농민생활)>를 출판했다. 이 책은 서구인에게 당시 중국의 현실을 알린 영문으로 된 최초의 책이었으며, "인류의 실상과 이론적 사업 발전에서 하나의 이정표"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2.2. 중화민국 시기

1938년, 페이샤오퉁은 중국으로 돌아와 원난대학에서 사회연구실을 세웠다. 당시 중국은 중일전쟁으로 초토화되고 있었지만, 그는 현지 조사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훗날 그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과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서 나는 지식인이 조국과 인민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라도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낮에는 일본군의 포격 사이로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을 조사하고, 밤에는 공습을 피해 동굴 속에서 호롱불 아래 젊은 동료들과 열띤 토론으로 지새웠다. 토지에 얽매인 가난한 농민의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 대한 조사결과는 후에 『Earthbound China(세속적인 중국)』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페이샤오퉁이 인류학에 기여한 것 중 하나는 중국 사회관계가 그 중심에 있는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작용하고, 사람이 이사할 때 친밀감을 감소시킨다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중국의 지역적 역사적 변동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중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연구에 편향적 관점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페이샤오퉁은 중국 민주동맹에 참가해 장제스와 국민당의 독재에 맞섰다. 그러던 중 1946년 원이둬(聞一多)와 리궁푸(李公撲) 교수가 암살당하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1947년 2월, 그는 베이징으로 귀환해 칭화대학의 교수에 부임했다. 이후 그는 『생육제도』와 『향토중국』, 그리고 『향토중건』을 집필해 중국의 가난과 낙후와 무기력의 암울한 현실을 신랄하게 분석하면서 미래를 건설할 대안을 제시했다. 이 시기 그는 매주 5~6편의 사설을 집필해 「관찰」잡지에 실어 지식인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2.3. 1차 시련: 반우파투쟁 시기

1949년 중국 공산혁명이 실현되자 많은 지식인들이 중국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 남기로 하고 그해 9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페이샤오퉁은 민주동맹당을 대표해 정치협상위원으로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1951년 중앙민족 방문단 남방문단 대리단장을 맡았다.
1952년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은 제국주의 학문이라는 비판과 함께 대학에서 철폐됐고 학자들은 공장 노동자나 외국문서 번역원으로 배치되었다. 하지만 페이샤오퉁 본인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아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중앙민족학원 부원장,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학부 위원을 역임했으며 소수민족 조사업무를 맡았다.

1956년, 페이샤오퉁은 강촌을 재조사하고『중방강촌(重訪江村)』이란 보고서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화려한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농민은 20년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사람은 많고 땅은 적은(人多地少) 중국의 현실에서는 농민의 자원과 노동력과 낮은 기술을 안정된 기조에서 생산력을 높일 수 있도록 결합하는 방안이 이데올로기의 순수함보다 더 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주장은 1957년 반우파 투쟁이 발발하면서 그를 위태롭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고 말았다. 그의 조사 보조원이었던 한 학생은 그가 서구 제국주의적 학문의 시각과 방법을 가지고 혁명적 현실을 왜곡하였고 학생들의 사상을 오염시켰다고 고발했다. 이후 그는 거센 비판을 받았고, 1958년 2월 1일 전국인민대표대회 1기 5차 회의는 "페이샤오퉁을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위원회 위원직에서 파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1957년 3월 24일 페이샤오퉁이 쓴 '지식인의 이른 봄기운'은 인밀일보에 실려 '우파'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매도되었다. 페이는 인민일보에 “인민에게 죄를 자복함”이라는 자술서를 발표하고 하방(下放: 강제로 농촌에 보냄)당했다.

2.4. 2차 시련: 문화대혁명 시기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후, 그는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갖은 모욕과 구타를 당했고 화장실 청소를 강요당했다. 그는 한때 자살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 며칠 전에도 집에 와서 담소를 즐겼던 나의 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또 하나의 연극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연출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이 거대한 파도를 막을 수가 없으며 억지로 거스르려고 했다가는 파도에 묻혀서 죽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단 이 거센 파도타기를 즐기기로 결정했다.”

그는 직접 “자본주의의 개”와 “제국주의의 시녀”, “반당반혁명분자” 등의 죄목을 써서 그 판을 목에 걸고 군중집회에 끌려 나갔다. 길에서 군중들이 “페이샤오퉁을 타도하라”라고 외치면 자신도 따라서 힘차게 그 말을 외쳤다고 한다. 그후 그는 허베이성의 어느 간부양성학교의 식당에서 잡역부 노릇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1972년 베이징 중앙민족학원에 배치되었으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신 영어 문서 번역 일을 맡아 <세계사>를 번역했다.

1975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페이샤오퉁이 아직 생존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에 중국 정부는 미국 학자들 몇몇이 그를 면담하는 걸 허용했다. 당시 65세였던 페이샤오퉁은 인민복을 입고 근 20년만에 처음으로 서방 사람과 만났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이전에는 인민의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계급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혁명은 나로 하여금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그는 혁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혁명이라고 답했다. 그러다가 이전의 모든 사상과 학문을 부정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개인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본인만이 알 뿐이다”

2.5. 개혁개방 시기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인 1978년, 그는 중국사회과학원 민족 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되었고 1979년 중국사회학 학회장을 맡았다. 1980년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최고인민법원 특별재판소에서 '린뱌오-장칭 반혁명집단 재판'의 재판장을 맡았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중국 사회과학원 사회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1982년부터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페이샤오퉁은 민주동맹의 당수이자 인민대표대회 상무부위원장으로서 덩샤오핑을 설득해 사회과학원에 사회학, 인류학 연구소를 설치하고 고급사회학 강좌를 조직해 사회학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중국 전역의 농민 수억명을 구제하는 농촌 산업을 육성하도록 정부를 설득했고, 총서기 후야오방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농촌의 공업화에 집중해 촌락을 하나의 집체적 기업 단위로 만들고 소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게 했다. 이 정책은 1980~90년대 중국 농촌의 생활 개선에 기여했고 현재까지도 중국 지역 사회 발전의 이론적 기본으로 간주되고 있다.

헌푠 페이샤오퉁은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현지조사를 지속했고 미국, 캐나다, 유럽, 일본, 호주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국제적인 영예를 얻었다. 페이샤오퉁은 또한 중국 역사에서 인종 집단에 대한 그의 영향력 있는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루이스 H. 모건의 단계 발전 진화론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의 작품 중 대표적인 예는 1988년 홍콩에서 강의한 "중국 민족성의 구성에서의 독창성과 통일성"이다. 페이샤오퉁에 따르면, 한족은 통일 진나라 시기에 진정한 민족 집단이 되었으며 이후 한나라 때 안정적인 농업사회를 구축해 중국 북방 유목민들을 끌어들이고 동화시킴으로서 중국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고 한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발했을 때 전국의 대학생과 지식인들은 페이샤오퉁이 나서서 정부의 강경 진압을 비판하고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침묵을 지켰고 이에 실망한 민주성향의 학생 및 지식인들은 그가 명예와 권력에 양심을 판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자신이 침묵을 지킨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우리가 고통과 좌절을 대가로 치르면서 줄기차게 염원해온 우리들의 신중국이 이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인민에게 봉사하고자 했던 그 일생의 꿈이 실현될 것인지 아니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인지의 엄중한 기로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 유혈적인 희생도 때로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희생을 감내할 진정한 자세이다."

2.6. 말년

페이샤오퉁은 말년에 중국의 서북지역, 서남지역, 황하 삼각주, 주장 삼각주, 환발해지역, 중원경제 협력지역, 회해경제 협력구, 동북지역, 경구철도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또한 그는 평생의 연구를 총결산해 <페이샤오퉁 문집>(16권)을 출판했다. 그러던 2005년4월 24일, 그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94세.

3. 저서

4. 수상

5. 가족 관계

페이샤오퉁은 1935년 옌징대학 사회학과 학생이던 왕통후이(王同惠)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영국으로 가기 전에 광시성 남부 일대에서 현지 조사를 수행했다. 그런데 야오산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중, 페이샤오퉁은 지역 주민들이 호랑이를 샤낭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에 걸려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이에 왕통후이는 급히 삼림을 뛰어나가 구조를 청하다가 그만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다음날 저녁 페이샤오퉁은 주민들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지만, 왕통후이는 7일만에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결혼한 지 불과 108일 만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1939년, 페이샤오퉁은 큰형의 소개로 쿤밍에서 맹음(孟吟)과 결혼했다. 그후 두사람은 55년 동안 함께했다. 그러나 1994년 12월 1일, 맹음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페이샤오퉁은 시를 지어 아내의 영혼을 위로했다.

6.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