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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9 09:01:17

페타르 즈린스키 / 프란 크르스토 프란코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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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ar IV Zrinski (1621 ~ 1671)
Fran Krsto Frankopan (1643 ~ 1671)

1. 개요2. 페타르 즈린스키3. 프란 크르스토 프란코판

1. 개요

17세기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크로아티아 왕국에서 일어난 마그나트 음모[1]의 주동자들.

1663년에 오스만 제국과 벌인 생고타르 전투의 승전 이후 상헝가리[2]에르셰쿠이바르를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는 조건으로 향후 20년간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불리한 조약에 반발하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레오폴트 1세에 의해 모두 비너노이슈타트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이때 부친을 잃은 상헝가리 출신의 헝가리인 귀족 퇴쾨이 임레오스만 제국메흐메트 4세와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

2. 페타르 즈린스키

당시 크로아티아 왕국의 태수[3]였던 형 니콜라 즈린스키, 아래 매형 프란 크르스토 프란코판과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후 형의 죽음으로 지배자 자리를 넘겨받고 위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나 필사적인 싸움 끝에 결국 레오폴트 1세에 의해 투옥되어 프란코판과 함께 처형되었다.

딸 옐레나 즈린스카(Jelena Zrinska 1643~1703)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유력 가문이었던 라코치 가문의 라코치 페렌츠 1세와 결혼하여 나중에 쿠루츠 봉기를 일으키는 라코치 페렌츠 2세를 낳았으며, 라코치 페렌츠 1세가 일찍 사망한 후 상헝가리의 유력 귀족 퇴쾨이 임레와 재혼하였다. 퇴쾨이 임레, 옐레나 즈린스카, 라코치 페렌츠 2세 모두 오늘날에는 헝가리의 독립운동가로서 헝가리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3. 프란 크르스토 프란코판

청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실력으로 시인이 되었으며 크로아티아 여러 지역에 살면서 다양한 방언을 익혀서 작품을 저술하였다.

또한 상술한 페타르 즈린스키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대항 실패로 수감된 도중에도 처형되기 전까지 여러 작품을 번역했으며, 17세기 크로아티아 문학 발전에 공헌을 남겼다.


[1] 이들의 이름에서 딴 즈린스키-프란코판 음모라고도 한다.[2]슬로바키아.[3] 크로아티아 태수(Hrvatski ban)는 부왕과 같은 자리로, 크로아티아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헝가리 왕국에서는 궁정백(Nádorispán), 크로아티아 왕국에서는 태수를 임명하여 귀족 의회를 관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