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포터필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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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前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존 이안 포터필드 John Ian Porterfield | |
출생 | 1946년 6월 10일 / 스코틀랜드 파이프 던펌린 | |
사망 | 2007년 9월 11일 (향년 61세) / 잉글랜드 서리 주 판햄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레이스 로버스 FC (1964~1967) 선덜랜드 AFC (1967~1977) 레딩 FC (1977) 셰필드 웬즈데이 FC (1977~1979) |
감독 | 로더럼 유나이티드 FC (1979~1981)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1981~1986) 애버딘 FC (1986~1988) 레딩 FC (1989~1991) 첼시 FC (1991~1993) 잠비아 대표팀 (1993~1994) 짐바브웨 대표팀 (1996~1997) 오만 대표팀 (1997) 트리니다드 토바고 대표팀 (2000~2001) 아센테 코코토 SC (2001~2003) 부산 아이파크 (2003~2006) 아르메니아 대표팀 (2006~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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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아르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대한민국에서는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맡아서 잘 알려져 있다. 2007년 7월 11일에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선수시절
15세때 리즈 유나이티드에 지원했으나 떨어졌고, 이후 레이스 로버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1967년부터 선더랜드에서 10년동안 활약했다. 선더랜드는 1973년 FA컵 결승전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 결승전 상대는 자신을 문전박대했던 리즈.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선더랜드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이 장면은 선더랜드 역사상 최고의 장면중 하나로 꼽힌다.[1] 1977년 레딩으로 잠깐 임대되었다가 셰필드에서 커리어를 마감했다.3. 감독으로
4부리그팀 로더럼을 맡아 3부리그로 승격시키고, 5부리그의 셰필드를 두계단 승격시켰다. 이후 알렉스 퍼거슨의 후임으로 애버딘의 감독을 맡아 두 차례의 리그컵 준우승과 유럽대회 진출을 견인했다. 1991년 들어와서 첼시의 감독을 맡았는데, 92-93시즌 스타트를 굉장히 잘 끊으며 첼시의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첫 우승을 이끄나 싶었으나, 크리스마스 이후 엄청나게 꼬라박으며 12경기 무승을 기록한 끝에 1993년 2월 경질.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첫 중도경질 감독이라는 오명을 쓰게되었다. 첼시에서의 경질 이후 1993년 잠비아 대표팀 감독을 맡아 1994년 아프리카네이션스컵 준우승을 견인했고, 1996년 영국으로 돌아와 볼턴 원더러스의 수석코치를 맡았으나 음주운전 사건에 연루되고 팀도 강등되며 다시 영국을 떠나 짐바브웨 축구 국가대표팀과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을 전전하나 여기서는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았는데 여기서 카리브해컵을 들어올렸다. 그러다가 2003년 부산 아이콘스의 감독을 맡게 된다.3.1. 부산 감독 시절
부산에 온 포터필드는 2004년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에 이어 2005년 K리그 전기리그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려놓는 등, 부산을 일명 대우 시절[2] 이후 짧은 중흥기를 맛보게 해 준다. 이 당시 조선일보에서 조 본프레레의 후임 감독으로 포터필드를 밀기도 했다. 그러나 전기리그 우승을 한 뒤 선수들의 나태와 포터필드식 4-4-2 전술의 핵심 선수인 박준홍이 시즌아웃당한 이후 제대로 추락하기 시작, 다음해인 2006년까지 26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당시 좋은 대진운까지 겹쳐 승승장구하며 올라간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또한 구단이 모처럼 야심차게 준비한 구덕운동장 홈경기에서 알 이티하드 FC에게 5-0으로 개박살나는 참사가 벌어졌다. 결국 2006 시즌들어서도 6경기동안 무승행진을 끊지 못하자 사퇴했다.[3]
그래도 그는 부산 구단에 긍정적인 유산을 많이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부산 프런트를 설득하여 부산 구단의 연습구장과 클럽하우스 준공을 주도한 일이다. 김우중은 축구단에 빵빵한 지원을 했지만 이 쪽엔 별 관심이 없었던 건지[4] 대우 로얄즈 선수들은 동아대학교나 동의대학교 축구장을 빌려서 연습했고, 이건 이후 부산에 들어온 현대산업개발도 마찬가지였는데, 포터필드 감독이 이런 인프라의 구축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것.
4. 이후
아르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았다. 2007년 유로 2008 지역예선 경기에서 스콜라리가 이끌던 강호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하고 폴란드에 1-0으로 승리하는 파란을 연출하며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2007년 7월 암이 악화되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그해 9월 11일에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선더랜드 AFC는 포터필드에게 레전드의 예우를 표하며 유해를 홈구장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아래 안장하였다.
5. 기타
알렉스 퍼거슨과 절친이였으며 퍼거슨에게 한국의 유망주를 소개하기도 했다.부산 감독을 맡을 당시 "축구는 신사의 스포츠"를 강조하면서 선수들이 이동할때 정장을 착용하게 하였으며, 그가 떠난 후에도 부산 선수들은 각종 행사에서 정장을 입는다.
K리그 외국인 감독 중에서는 2번째로 오래 감독 생활을 했다. 1위는 포항의 파리아스, 3위는 서울의 귀네슈 감독였다.
부산 감독 시절 그가 가장 높게 평가했던 선수는 김용대였으며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빅리그로 갈 수 있는 재능이라고 칭찬했다.
부산에 부임 후 제이미 큐레튼, 크리스 마스덴, 앤디 쿠크 등 영국 출신의 외국인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K리그에는 영국 출신 선수들이 드물기에 이는 작은 화제였다. 이 중에서 성공적으로 팀에 보탬이 된건 앤디 쿠크 한 명 뿐이었다는게 흠이다.
[1] 당시 선더랜드는 2부리그 팀이였고, 리즈는 리즈 유나이티드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당시 진짜 리즈 시절을 달리고 있던 팀이였다.[2] 부산에서 축구가 야구보다 인기가 더 많던 시절인 부산 대우 로얄즈 시절을 말한다.[3] 문제는 포터필드의 후임이자 부산빠들의 최악의 흑역사+금지어 감독인 안드레 에글리 감독 지휘 아래서 팀은 더 부진을 겪었다는 거다. 36경기 20득점을 찍던 에이스 뽀뽀를 마음에 안 든다고 보내버리는 등의 무리수를 두었다. 풋케위키에선 아예 대놓고 스위스 출신의 사기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나름 부산에 대한 애정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부산 경기 홍보하고 사람들에게 입장권을 나눠주는 등, 관중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했다.[4] 이것이 바로 박태준과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박태준은 한국 최초의 축구전용 구장과 역시 한국 최초의 클럽하우스를 세우는 등 이런 기초적인 인프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