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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13 10:08:43

포항공과대학교 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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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 포항공과대학교 방송국
국문약칭 포항공대 방송국
영문명칭 Postech Broadcasting System
영문약칭 PBS
소재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암로 77 포항공과대학교 학생회관 3층 305호[1]
홈페이지 포항공과대학교 방송국 홈페이지
PBS / Postech Broadcasting System
하나의 마음, 하나의 소리, P.B.S.
1. 개요
1.1. 방송 경로
2. 역사
2.1. 탄생2.2. 동아리 '방송문화연구회'(1989~1998)2.3. 자치단체 PBS 1기(1999~2005)2.4. 암흑기(2006~2008)2.5. 자치단체 PBS 2기(2009~2012)2.6. 언론기구 PBS(2013~)
3. 구성 및 활동
3.1. 직급3.2. 부서 및 활동3.3. 기타 활동

1. 개요

포항공과대학교 방송국 PBS는 포항공과대학교 총학생회의 언론기구 중 하나로 방송 영역을 전문으로 하여 설치된 언론기구이다. 영문명 PBS는 Postech Broadcasting System의 약자. 여기와는 상관없다. 기구장의 호칭은 국장. 뉴스 및 심층보도 프로그램은 물론 예능이나 토크쇼 프로그램도 제작하여 방송한다.

1.1. 방송 경로

2007년도부터 자체 홈페이지를 사용해 왔다. 2015년 기술적인 문제로 서버가 닫혔다가 2017년 9월 다시 오픈되었다.. 현재 홈페이지와 더불어 자체 페이스북 페이지자체 YouTube 채널을 통해 활동하고 있다.

2. 역사

2.1. 탄생

PBS의 탄생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1986년 포항공과대학교가 개교한 이후, 1987년 4월 '신문방송사'라는 조직이 학장직속기관으로 설립된다. 당시 신문방송사는 학교에서 심혈을 기울인 조직이었는데, 방 크기만 해도 지금의 신문사 크기 + 방송국 크기로, 학생회관 날개 한 쪽을 거의 다 차지했다.[2] 이 조직은 1988년 가을 '신문사'와 '방송사'로 분리되었고[3], 이후 방송사는 '방송문화연구회'라는 이름의 동아리(서클)로 등록된다.

학장직속기관이었던 방송사가 동아리가 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당시의 포항공대신문 사설에 따르면, '방송국은 학교 측에 필요한 방송 기자재를 신청해 놓고 A∙V실(시청각실)의 기자재를 임시로 빌려 점심과 저녁 시간에 음악 방송만을 진행하였다. 이 때의 위상은 학장직속기관 이었으나 이후 1988년 11월 중순경 예산 문제를 핑계로 갑작스럽게 동아리(학생 서클)가 되었고, 이를 통보 받았다.'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이럴 거면 애초에 왜 만든 거냐 예나 지금이나 통보가 트렌드 한 편, 1999년도 교지와 1998년 포항공대신문 기사를 보면 90년대 학생운동 당시 방송국에서 방송 동아리로 강등되었다고 한다.뭐가 진짜인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학교측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2.2. 동아리 '방송문화연구회'(1989~1998)

동아리로 강등된 이후 PBS는 개인 사비와 스폰서 등을 통하여 장비를 마련하고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눈물 학기 중에는 LP판을 이용해 정규 음악방송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4] 매년 봄 축제(해맞이한마당)에서 'POSTECH 가요제'를 개최하였으며, 95년도부터 'PBS 가요제'로 이름을 바꾸어 개최하였다. 1990년도 가을 축제[5]부터는 'PBS 방송제'를 개최하여 뉴스와 모노드라마 등 영상들을 제작하여 상영하였다.영상 뉴스가 1년에 딱 한 번이었다는 이야기다. 96년도에는 포항MBC를 견학하고 '주간 영일만' 제작팀과 교류하기도 했다고 카더라. 이는 폐지된 고대 프로그램으로, 지금은 다시 보기도 안 된다(...)

2.3. 자치단체 PBS 1기(1999~2005)

1998년 11월, 총학생회칙이 91년 이후 7년 만에 개정되면서 정식 자치단체로 승격되었다. 그 결과 동아리의 예산 한계로 매우 낙후되어 있던 장비들을 새로 지원받는 등 방송의 질을 높이고 언론기구로서의 역할을 위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개인 돈으로 구매했던 장비들을 그 때 까지도(10년 이상) 계속 쓰고 있었다.) 이에 1999년도부터는 해오름식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PBS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1999년 부터다.

2.4. 암흑기(2006~2008)

그러나 PBS는 자치 단체로 승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어찌하지 못한 채 방황하였다. 이미 2004년 가을부터 존재감이 실종되었다며 활성화를 공약으로 들고 나온 선본이 있었으며, 실제로 2006년 1학기에는 인원 부족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원은 8명이 전부였는데, 이마저도 당시 생각나눔 위원장이 포준위 영상팀 인원을 끌고 와서 다시 살린 것이라 카더라(...) 관련 인터뷰 이로서 총학생회의 일부가 된 PBS는 존재감 자체도 사라지게 되었다. 2007년 당시엔 캠코더가 1개 뿐이었다는 기사가 있다(...)

2.5. 자치단체 PBS 2기(2009~2012)

2009년도에는 학생기구 가운데 언론기구(자치단체)로 재승격되었으며, 대표자운영위원회에서 업무보고를 하였다.언론 감시 아닙니까 이거 당시엔 언론 기능이 전무했다 카더라 존재 가치 자체를 의심받았던 교편위와 총여학보다는 유리했지만, 2010년부터 당시 국장의 노력으로 다수의 국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요약하면 2012년 이전까지 활동을 종합해 볼 때 당시의 PBS는 '방송문화연구회'에 더 가까웠다(...) 포카전을 비롯한 학교 행사에 자주 동원되어 영상을 촬영하고, 축제영상을 업로드 하는 기능 위주였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당시 PBS는 치어로와 축제, 경영연구 동아리 등의 영상 촬영 등 대학본부와 여러 단체의 외주 위탁 촬영을 주로 했다. 더해서 가끔은 문화콜로키움(!)도.

2010년에 첫 영상 뉴스가 나왔고, 동아리를 소개하는 라디오 인터뷰 프로그램도 시리즈로 발표되었으나, 기획부의 실종으로 2011년에 대가 끊겼으며 서버의 폐쇄로 영영 잊혀진 기록이 되었다. 지금의 PBS는 당시 최소한 2년 이상의 방황을 통해 정립된 것이다. 그 시절 동안 온갖 파일럿 방송들이 난무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에는 영상 편집만으로도 추출에 한세월, 편집에 한세월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업무가 편집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학생들을 각 부서에 둠으로서 실력을 기르게 하는데 실패한 것이 원인이었고, 올라운드 제작자가 나올 때까지 상황이 개선될 수 없었다.

2.6. 언론기구 PBS(2013~)

2012년 총학생회칙 개정으로 정식 명칭이 '방송문화연구회'에서 '방송국'으로 변경되었다. 이 때부터 생각나눔 등과 함께 학생기구 산하의 전문기구에 속하게 되어 대표자운영위원 및 전체학생대의원회의 대의원 자격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해 12월 전학대회로 2013년을 기해 총학생회칙 개정에서 언론기구로 분류되었고, 2014년부터는 회칙 개정으로 교지편집위원회와 함께 중앙운영위원 및 전학대회 대의원 지위에서 제외되었다. 명목 상으로는 '언론기구가 의결기구의 간섭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사실 언론기구의 의결권이 너무나 막강해져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었다.

이후 인터넷 통신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영상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제 역할을 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 수가 드디어 1000을 넘었다! 2020년 9월 18일 기준 포카전을 통한 교내 시청자 수 유입으로 드디어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 1000명을 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3. 구성 및 활동

3.1. 직급

PBS의 국원은 수습국원, 정국원, 명예국원, 휴면국원으로 나뉜다.

3.2. 부서 및 활동

PBS는 빡셈을 담당하는 보도부, 약 한 사발을 담당하는 편성제작부, 얼굴마담 아나운서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서는 전년도 해당 부서 부장을 맡았던 상임 고문꼰대 1명과 부장 1명, 정국원들과 수습 국원들로 구성된다.

3.3. 기타 활동



[1] '여기는 305호'라는 프로그램이 제작된 원인이다.[2] 현재는 신문사와 방송국 사이가 가벽으로 막혀 있다.[3] 현재 포항공대신문사는 총장 산하의 학생단체이다. 학생 기자들이 기사를 쓰고 원고료를 받는다.[4] 현재 LP 플레이어는 남아 있지 않으나 스튜디오 한 쪽 구석에는 LP판 수백장이 쌓여 있다.[5] 지금은 포카전으로 인해 사라졌으나 원래는 '형산제'라는 이름의 가을 축제가 있었다.[6] 심층보도 프로그램이 왜 '다큐멘터리'일까. 굳이 따지자면 POQ의 첫 영상인 2012년 겨울 마포역에서 녹화하여 2013년 여름(!) 발표한 '두 남자의 희망고구마'#가 다큐멘터리 였기 때문이다. 영상의 선배 학생은 편집물이 올라온 시점에 이미 자퇴했고, 그 자퇴서는 유출되어 잠시나마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구었다 영상은 장장 30분에 달하는, 단순 실황 영상을 제외할 경우 지금까지도 PBS 사상 가장 긴 편집 영상물이다. 자막작업 만으로도 너무나 빡센 영상이었기에, 당시 제작을 맡은 학생들은 3년 뒤 POQ 후속편을 후배들이 예토전생 제작하리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다. 컨셉 또한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