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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8 16:15:44

표트르 사비츠키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표트르 사비츠키
П.Н. Савицкий
파일:포트르 사비츠키.jpg
본명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사비츠키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Сави́цкий
출생 1895년 5월 15일
러시아 제국 체르니히우
사망 1968년 4월 13일 (향년 72세)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국적
[[러시아 제국|]][[틀:국기|]][[틀:국기|]]
가족 니콜라이 표트로비치 사비츠키 (아버지)
학력 페트로그라드 공과대학교 경제학과
직업 언어학자, 역사학자

1. 개요2. 생애3. 유라시아주의 활동4. 유라시아주의 저서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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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표트르 사비츠키는 러시아의 경제지리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시인, 유라시아주의자이다.

2. 생애

사비츠키 표트르 니콜라예비치는 1895년 5월 15일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으로 이주했으며, 1918년 말 우크라이나 인민군에 복무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남러시아 정부에 참여했으며, 스트루베가 남러시아 정부의 외교국을 이끌던 시기에 그의 비서로 활동했다(1920년 4월~11월). 키예프로 진격하는 페틀류라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그는 오데사, 예카테리노다르, 폴타바, 하르키우, 로스토프 등 여러 도시에서 거주하며 활동했다. 1918년에는《경제의 형이상학과 경험적 인식》(Метафизика хозяйства и опытное его познание)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이 책은 1925년에 출판되었다.

1919년 12월부터 1920년 4월, 그리고 1920년 5월부터 7월까지 그는 해외로 파견되어 안톤 데니킨표트르 브란겔의 행정 대표로 파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러시아 망명자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는 1920년 4월에 설립된 남러시아 정부에서 외무국 경제 부서장과 경제국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11월, 백군과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철수했다. 1921년 소피아로, 이후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는 프라하에서 1922년 사립강사가 되었고, 러시아 법학부(1922–1925), 러시아 자유대학(1923–1940), 러시아 농업협동조합 연구소(1925–1931), 독일 대학(1935–1941) 등에서 강의했다. 또한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베를린 러시아 과학 연구소에서도 강의를 진행했다. 1935년부터 1941년까지 그는 프라하 독일 대학에서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그는 유라시아주의 운동의 주요 조직자이자 이론가로 활동하며 여러 유라시아주의 관련 출판물을 편집했다.

1920년대 사비츠키는 러시아 이민자들의 반소비에트 음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트레스트(Trest)" 조직과 연계되었으며, 1927년 2월에는 "유라시아당"을 창설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 유라시아주의가 미르스키 대공의 좌파와 트루베츠코이의 우파로 분열되자 그는 우파를 선택하고 좌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본 제국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소련을 옹호했으며,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이후 소련과 독일의 협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서구 민주주의를 문화적 수동성과 부르주아적 성격 때문에 비판했다.

1938-1939년, 사비츠키는《러시아의 지정학적 기초》라는 미완성 저서를 집필했으며, 유라시아주의 운동을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그는 프라하의 러시아 고등학교 교장을 맡았다. 1945년 5월 프라하 해방 이후, 그는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반소련 활동" 혐의로 NKVD 특별회의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모르도바의 템니코프 교정노동수용소에서 복역했다. 1956년에 석방되어 프라하로 돌아갔으나, 학문적 활동은 금지되었다.

그는 체코어 번역 작업과 시 창작에 몰두했으며, 1960년 파리에서 출판된 시집 《씨앗》(Посев)에서는 수용소 경험을 다루었다. 이 시집으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국제 학계의 압력, 특히 버트런드 러셀의 지원으로 곧 석방되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여러 학술 기관에서 학술 활동을 계속하며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러시아 이민 지식인 및 레프 구밀료프와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다. 1961년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에 의해 또다시 체포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그의 시집 발간과 관련이 있었다. 이 시집에는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다룬 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962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68년 4월 13일, 사비츠키는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유라시아주의 활동

1920년대 후반, 그는 프라하 언어학파에서 활동했으며, 로만 야콥슨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와 함께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사비츠키는 1921년 유라시아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1920~1930년대 유라시아주의의 지도자 및 이념적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7개의 유라시아주의 논문집을 편집했으며, 유라시아주의와 관련된 수많은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독자적인 대륙으로 정의했으며, 이는 동서, 신앙, 과학적 지식의 융합체로 간주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그는 러시아-유라시아의 지리적·기후적 공간의 독창성을 강조하며, 이는 독특한 토양 및 지리적 구역의 "깃발형" 배치를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1927년, 프라하에서 그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특성》(제1권: 식생과 토양) 및 《러시아: 독특한 지정학적 세계》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와 함께 그는 러시아 역사의 "지질학적 측면"을 다룬 논문을 게오르기 베르나츠키의 저서 《러시아 역사 개요》(1927)의 부록으로 발표했다.

사비츠키의 가장 중요한 공로는 유라시아주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그는 러시아 역사를 "지리적 세계로서의 유라시아가 지리정치적 통일체로서의 러시아-유라시아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는 러시아가 "동서양의 통합체"이며, 특히 "아시아적 요소"와 "초원의 역동성"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몽골 제국의 지배가 러시아 민족의 심리, 생활 방식, 사회 구조 및 국가 정체성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또한 몽골 제국의 영향이 러시아 민족의 창조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며, 리투아니아폴란드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러시아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사비츠키는 볼셰비즘을 서구 물질주의무신론의 산물로서 단호히 거부했으나, 볼셰비즘이 러시아를 유럽적 존재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고 계획 경제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유라시아주의와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유라시아주의적 경제 계획이 볼셰비즘보다 더욱 급진적이라며, 유라시아주의를 "초(超)사회주의"로 정의했다.

4. 유라시아주의 저서

5.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