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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7:13:08

프레디 비켈

파일:Fredy Bickel.jpg
이름 프레디 비켈
Fredy Bickel
본명 알프레트 비켈
Alfred Bickel
출생 1918년 5월 12일
독일 제국 엡슈타인
사망 1999년 8월 18일 (향년 81세)
국적
[[스위스|]][[틀:국기|]][[틀:국기|]]
포지션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80cm | 82kg
소속팀 선수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35~1956)
감독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58~1960)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63~1964)
국가대표 71경기 15골 (스위스 / 1936~1954)
가족관계 아들 토마스 비켈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사생활5. 수상
5.1. 선수
5.1.1. 클럽5.1.2.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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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비켈은 1935년 11월부터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에서 뛰게 되었다. 당시 그라스호퍼의 새 감독은 카를 라판이었고 세베리노 미넬리 등 많은 스위스 대표팀 주축 선수들과 함께 1948년까지 그라스호퍼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 되었다.

1936-37 시즌에 그라스호퍼는 더블을 달성했고 비켈은 그라스호퍼에서 뛸 동안 5차례 더블을 기록했다.

비켈은 그라스호퍼에서 21년간의 모든 선수 생활을 보냈으며, 많은 팀들의 제의를 뿌리치고 그라스호퍼에만 충성한 선수였다.

2.1.2. 국가대표

1936년 6월 18일, 당시 18세의 비켈은 노르웨이를 상대로 첫 A매치에 출전했다. 그리고 3일 후의 스웨덴전에서 비록 스위스는 2대5로 패했지만 마수걸이 골을 넣었다.

1937년, 카를 라판이 대표팀 감독도 같이 맡게 되면서 비켈의 경기력은 더 좋아졌다. 그러나 10월 31일, 제네바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2대2 무승부에서 그는 쇄골 골절로 전반 28분에 경기에서 빠졌다. 이후 1938년 2월 6일, 독일과의 시합에서 나티가 인상적인 경기력으로 1대1 무승부를 기록할 때 복귀했다.

1938년 5월 21일, 스위스는 잉글랜드를 2대1로 꺾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켈은 라판의 지시에 따라 2선 공격수 역할을 하며 에디 햅굿을 축으로 한 잉글랜드 수비진들의 호흡을 깨뜨렸다. 직접 비켈이 이 경기에서 득점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활약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1938년 월드컵에서 비켈은 독일과의 1라운드 재경기에서 2대2로 따라붙는 동점골을 넣었다. 스위스는 결국 독일을 4대2로 잡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어 8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헝가리의 벽을 넘지는 못하고 8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비켈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도 꾸준히 스위스 대표팀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12년 만에 다시 열린 월드컵에 주장으로 출전했다. 그는 스웨덴에리크 닐손과 더불어 2차 대전 전후의 월드컵에 모두 참가한 유이한 선수가 되었다. 스위스는 재키 파통의 2골로 호스트 브라질과 2대2로 비기는 선전을 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 0대3으로 패하는 바람에 브라질에 밀려 결승 리그 진출에는 실패했다.

1954년 5월 30일, 1954년 월드컵을 앞두고 치러진 마지막 평가전에서 비켈은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했다. 그는 71경기에서 15골을 넣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정확한 크로스와 미묘한 볼 핸들링, 놀라운 트릭을 가진 포워드. 클럽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높아 그라스호퍼 서포터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4. 사생활

비켈이 45살에 본 늦둥이 아들 토마스 비켈도 축구 선수였으며 1994년 월드컵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2]

5.1.2.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비켈은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