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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흥백제의 2번째 임시수도. 풍왕이 주류성의 척박함을 이유로 천도를 한 곳이나, 이후 신라와 너무 가까워져 수도 역할은 2개월 밖에 하지 못 하였다. 학계에서는 피성을 현 전라북도 김제시에 위치한 성산성으로 보고있다.2. 역사
피성 천도는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한다. 너무 잠깐만 수도 역할을 해서 나당연합군이 이를 몰랐거나, 굳이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겨울 12월 병술(丙戌) 초하루: 백제왕(百濟王) 풍장(豊璋), 그 신하 좌평(佐平) 복신(福信) 등은 사이노무라지(狹井連)[1], 에치노하타노 타쿠츠(朴市秦 田来津)[2]와 의논하기를 “이 주유(州柔)[3]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이곳은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고련단경(古連旦涇)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수렁과 커다란 둑으로 된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땅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트리면 물이 쏟아진다. 꽃과 열매가 있는 나무에서 얻는 토산물은 삼한(三韓)에서 가장 기름질 것이며, 옷과 음식의 근원은 천지 사이에 숨어 있는 곳일 것이다. 비록 낮은 땅(평지)이라고 하지만 어찌 옮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에치노하타노 타쿠츠가 혼자 나아가 “피성과 적이 있는 곳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굶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오지 않는 것은 주유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물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은 땅에 머물면 어찌 굳건히 살겠으며 흔들리지 않음이 오늘날에 미치겠습니까?”라고 간하였다. 끝내 (백제왕은) 간하는 말을 따르지 않고 피성에 도읍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663년) 2월에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한 [백제의]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고,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1천 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2년(663) 봄 2월 (乙酉) 초하루: 병술 백제가 달솔(達率) 김수(金受)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개 주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安德)[4]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 이에 피성(避城)이 적과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형세가 머물 수 없어 주유(州柔)에 돌아와 살았으니, 타쿠츠(田來津)가 헤아린 바와 같았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그러나 피성으로 천도한 직후 신라군이 백제 남부로 쳐들어와 거열성, 거물성, 사평성, 덕안성을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피성과 국경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너무 위험해 결국 2달도 안 돼 다시 주류성으로 환도하게 된다. 이런 의견 충돌과 잘못된 판단은 부흥백제군의 내분과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1] 이름이 누락됐다. 풀네임은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狹井連 檳榔).[2] 풀네임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朴市秦造 田来津). 아지마사와 타쿠츠는 백제인이 아닌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들이다. 타쿠츠는 후에 백강 전투에서 전사하게 된다.[3] 주류성(周留城)을 가리킨다.[4] 삼국사기와 교차검증해보면 이 안덕은 충청남도 은진 지역인 덕안의 잘못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