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인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옛 자동차 기업이자 KG모빌리티의 모태에 대한 내용은 하동환자동차제작소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5fac><colcolor=#fff> 하동환 河東煥 | Ha Dong Hwan | |
출생 | 1930년 7월 29일 |
경기도 개성부 (現 개성시) | |
사망 | 2018년 5월 27일 (향년 87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내 장청자 아들 하성수[1], 딸 하성희, 하정은, 하승연 |
경력 | 한원그룹 초대 회장 한원미술관 명예 회장 동아자동차(구 하동환자동차제작소)[2] 초대 대표이사 |
호 | 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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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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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 동아자동차 대표 시절 |
드럼통 버스왕
대한민국의 前 기업인.한원그룹, 한원미술관과 대한민국 1세대 자동차 제조사인 KG모빌리티[3] 창업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1930년 개성시에서 태어났다.하동환은 10대 시절부터 신촌의 자동차 정비 공장에서 일하며 자동차에 대해 배웠다. 이후 한국 전쟁 후 자신이 직접 차를 만들기로 결심하여 1954년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천동(現.신촌동) 자택 앞마당에 천막 공장을 지어, 국제차량제작에 이은 한반도 2번째 자동차 기업인 '하동환자동차제작소'를 설립한다.[4] 놀랍게도 창업자인 하동환은 당시 굉장히 어린 나이인 23세 청년이었다. 폐차된 미군 트럭 엔진과 변속기를 활용하고 드럼통을 펴 차체를 제작하여 드럼통 버스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버스를 출시했다. 이 드럼통 버스가 지금의 KG모빌리티를 있게 한 그 역사의 시발점이다.
1962년 동방자동차공업에 역합병되어 하동환자동차공업(주)로 출발함과 동시에 구로동으로 공장을 옮긴다.[5] 하동환뻐스 시리즈는 큰 인기를 얻으며 60년대 대한민국 버스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했는데, 60년대 서울 시내에서 굴러다니던 버스의 70%가 하동환자동차 버스였다. 1966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남베트남과 보르네오에 버스를 수출하였다.[6] 이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도 관련 내용을 다룬 바 있다.[우최통]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수출은, 버스?
그러나 1967년 아시아자동차의 버스 등이 잇달아 출시되어 하동환 자동차는 부실 위기에 처했다. 상공부의 자동차 산업 계열화 정책으로 신진자동차 계열사로 편입되었다. 신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토요타 버스들 (FB100LK, DB102LC,[7] 라이트 버스)를 위탁 생산했고, 이에 따라 자체 모델 버스 생산은 중단됐다.[8][9] 1974년 4월 기간산업체로 지정됐다.
1975년 3월 신진자동차에서 독립하고, 동년 5월 기업공개로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1977년 동아자동차공업(주)로 사명을 변경하고 자회사 동아정기를 설립했다. 경기도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부평 공장도 세웠다.[10] 1979년 평택군 송탄읍 칠원리 목장 부지 일부에 공장을 세웠다.
하동환뻐스는 60년대 시내버스 시장의 최강자였지만, 1967년 신진자동차에 합병된 후 토요타 버스를 라이선스 생산하면서 자체 버스 모델 생산은 11년동안 중단되었다. 그 사이 1977년 새한자동차에서 대한민국 버스사에서 길이 남을 명작인 BF101를 출시하여 시장을 석권했고, 비슷한 시기 현대자동차도 자체 시내버스 모델의 본격적인 시초인 HD170도 출시되었다. 동아자동차는 11년 만인 1979년 다시 일반버스 (시내버스) 독자 모델을 출시했지만 BF101과 HD170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1977년부터 닛산디젤(현 UD트럭)과 기술 제휴로 생산한 동아자동차의 HA/HR 고속버스 시리즈가 UD엔진의 믿음직한 성능과 내구성에 힘입어 고속버스 시장에서 안정적인 점유율을 차지했다. 그리고 1978년부터 닛산디젤과 기술제휴로 생산한 국내 최초의 트레일러 차량인 DA10 트랙터 또한 큰 성공을 거두었고 DA트럭 시리즈로 한동안 국내 트레일러 시장을 석권하였다.
1980년엔 방위산업체로 지정됐다. 19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에 따라 1981년 특장차 전문 업체로 지정됐다가 이듬해에 해제됐다. 참고로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 때 기아산업과 가칭 한국자동차로 합병을 시도했으나 흐지부지됐었다.
1984년 (주)거화[11]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4WD 차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5년 거화 부산 공장 부지를 럭키개발에 매각하고[12] 생산 라인을 평택공장[13]으로 통합시키고 1986년 거화와 거화서비스, 거화개발 3사를 합병하여 서울 중구 저동2가 24-1에 신축된 쌍용빌딩[14]에 본사를 이전했다.
하동환 회장은 창업 이래 '무차입 경영'을 선호해욌으나,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신차 개발에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부담을 느꼈다. 거기다 모기업을 거느린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는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아 신차 개발에 투자했지만 동아자동차는 자금력에 한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거화 시절부터 개발한 코란도 훼미리가 5공 정부의 자동차산업 합리화조치에 의해서 출시가 불허됐다. 이미 거화 인수에 많은 자금을 쏟았고, 거화 때 개발하기 시작한 코란도 훼미리를 마저 개발하는 데 350억을 투자했지만 신군부의 불허로 코란도 훼미리를 출시하지 못 하게 되자 다시 자금난에 시달리게 됐다. 결국 하동환 회장은 동아자동차를 쌍용그룹에 매각하기로 결심했고, 1986년 11월 쌍용그룹에 동아자동차 지분을 매각하면서 자동차 산업에서 손을 뗐고 당시 자회사였던 동성개발 (현 심팩)도 함께 매각되었다.
반면 동아자동차의 전 사주였던 하동환은 동아정기만 지켜 '한원그룹'과 '한원미술관'을 출범했다. 그가 출범시킨 그룹 명칭도 자신의 호에서 나왔다.
이후 2018년 5월 27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1] 현재 한원미술관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2] 이후 쌍용그룹에 인수되어 쌍용자동차가 되었다가 많은 풍파를 거친 후 KG그룹 자회사인 KG모빌리티가 되었다. 이후 KG모빌리티측이 1954년 역사까지 회사 연혁으로 포함시키면서 하동환 회장을 KG모빌리티 초대 대표이사로 인정했다.[3] 구 하동환자동차-동아자동차-쌍용자동차. 하동환 회장이 별세하고 5년 뒤에 쌍용자동차가 KG모빌리티로 사명을 변경하여 하 회장은 마지막까지 쌍용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알고 세상을 떠났다.[4] 이들보다 더 오래된 조선국산자동차라는 기업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였고 이스즈가 일본국 정부에 의해 일본군의 군용차량을 생산 및 납품할 목적으로 설립된 '자칭' 차량 제조사였다. 그러나 조선국산자동차는 실제로 자동차를 만든 적은 없고 일본에서 만든 자동차를 수입판매한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자동차 회사로 보기는 애매하고 한반도 최초의 독점 딜러십에 불과했다.[5] 당시 행정구역상 영등포구 관할로 지금 구로역 근처에 있는 KG모빌리티의 서울A/S사업소 자리였다. 평택공장 준공 이후에도 구로공장은 바로 폐쇄되지 않고 단계적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해 1985년에 이르러서야 평택공장 이전이 완료됐다. 현재는 구로동에서 군포로 A/S 사업소를 이전했다. 현재 KGM 구로서비스센터와는 전혀 무관하니 주의.[6] 아쉽게도 이는 비공식 기록이며 공식 기록은 1976년 6월, 에콰도르에 수출한 현대 포니 6대이다.[7] 이 두 차종은 본래는 보닛형 프론트 엔진 버스 새시로 개발됐으나 이후 캡 오버 형태로도 나왔다. # 토요타 이름을 달고 나온 마지막 중형급 이상의 버스 섀시 중에 하나로 1967년 토요타가 히노를 인수하면서 그 이후로 중형급 이상 버스는 일본의 히노자동차로 일원화했다.[8] 당시 신진 버스는 일본의 토요타에서 부품을 공급받았고, 하동환 버스는 일본의 닛산디젤에서 부품을 공급받았다. 그런데 효율성을 위해 버스 생산 모델을 통일하려 할 때 토요타 측에서 닛산디젤보다 부품 공급 가격을 저렴하게 제시했기 때문에 하동환 버스는 단종되고, 신진 버스를 위탁 생산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신진 버스는 토요타제 4행정 가솔린 엔진이나 디젤 엔진을 썼으나, 하동환버스는 닛산디젤제 2행정 디젤 엔진을 썼는데, 2행정 디젤 엔진 특성상 매연이 심해서 도시의 대기 오염이 상당했던 것도 신진자동차의 버스 모델로 통일하는데 한 묷 했다.[9] 이후 신진의 버스 부문은 대우로 넘어가 자일대우버스가 되었다.[10] 현재 부평정비사업소.[11] 과거의 사명은 '신진지프자동차' 였다. 현재 한국GM의 모태인 신진자동차와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AMC와 합작해 설립한 신진지프가 실적 부진으로 AMC가 지분을 철수하고, 철수 지분을 계기로 리비아에 디젤 지프를 수출하는 것이 꼬투리잡힌 바람에 남겨놓은 '지프' 브랜드까지도 철수를 시작하면서 '신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다가, 이후 '거화'로 사명을 변경했다. 참고로 그동안 쌍용그룹의 거화 인수 시기가 1980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986년이다. 거화는 1984년 연말 시기에 흑자도산했는데, 그 뒷 배경에는 부자 간의 경영권 다툼이 있어서 당시 상당히 씁쓸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 '신진지프자동차'가 '신진자동차'를 거쳐 '거화'로 사명을 변경했다. 당시 거화는 신진그룹의 마지막 후신인데, 하동환자동차가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자회사로 편입됐던 시절을 생각하면 11년만에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12] 이에 따라서 주례럭키이파트가 들어섰다.[13] 당시의 명칭은 평택-송탄 통합 이전인 송탄시 지역이라 '송탄공장'이었다.[14] 1968년 완공한 쌍용양회의 본사 건물, 즉, 쌍용그룹의 헤드쿼터인 건물로, 빌딩의 이름도 '쌍용빌딩' 이였다. 즉, 쌍용 인수 이전에 이미 쌍용 소유 부동산에 입주한 것. 이후 쌍용그룹이 자금난으로 건물을 매각했지만 아직도 쌍용양회는 그 빌딩에 입주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