早川 雪洲 | Sessue Hayakawa 하야카와 셋슈 | |||||||||
국적 | 일본 | ||||||||
출생 | 1886년 6월 10일 일본 나나우라[1] | ||||||||
사망 | 1973년 11월 23일 일본 도쿄 | ||||||||
직업 | 배우 | ||||||||
활동 기간 | 1914년 ~ 1966년 | ||||||||
가족 | 배우자 아오키 츠루 자녀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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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배우.2. 경력
할리우드에서 활약한 최초의 동양인 배우였다. 하야카와가 1915년에 제시 L 라스키 피처 플레이 컴퍼니(Jesse L. Lasky Feature Play Company)와 전속 계약을 맺었을 때 받았던 주급이 1천 달러였고, 1917년에는 주급 7500달러를 받았는데, 이는 1915년에 에세네이 영화사와 주급 1250달러에 계약하고 1916년에는 뮤추얼 영화사와 주급 1만 달러에 계약했던 당시 할리우드 최고 스타 찰리 채플린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그는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하고 1920년대부터 미국에서 반일이 거세지면서 인기가 떨어지게 된다.1937년에 막스 오퓔스 감독의 영화 요시와라에 출연하기 위해 프랑스에 간 하야카와는 영화 촬영이 끝난 후에도 프랑스에서 영화사까지 설립하며 계속 활동했다. 그러던 도중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가족과 떨어진 채 프랑스에서 지내게 되었다.[2] 그리고 1944년 연합군에 의해 파리가 해방된 이후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수감된 일본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프랑스에 머물며 배우 활동을 했지만 출연료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종이나 손수건에 그림을 그려서 판 돈으로 먹고 살았다고 한다.[3] 그러다가 1948년 하야카와가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할리우드 스타 험프리 보가트가 전보로 하야카와에게 영화 출연 오퍼를 했고, 주 푸랑스 미국 대사관에서 하야카와에게 특별 비자를 발급해준 덕분에 하야카와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새해 첫날에 미국 뉴욕에 도착한 하야카와는 미국 영화 관계자들과 언론으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같은 해 Three Came Home라는 영화에 일본 육군 대령 역으로 출연했다. 동년 10월에는 13년 만에 일본에 귀국해서 일본의 영화사 다이에이와 출연 계약을 맺고 일본에서도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0년부터 1968년까지 하야카와는 수십 편에 달하는 미국과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이 콰이 강의 다리다. 만년에는 뇌연화증과 치매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73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3. 여담
- 할리우드 무성영화 스타였던 시절의 하야카와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남성 섹스 심벌이기도 했다. 인종차별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반면 이 당시 일본에서는 하야카와를 거의 매국노 취급했다. 그 이유는 하야카와가 1915년에 출연한 세실 B. 드밀 감독의 영화 The Cheat(사기꾼) 때문인데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이 플레이보이에 포악하고 잔인한 일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The Cheat는 상영이 금지됐고, 일본 정부에서는 주미 일본 대사관을 통해 세실 B. 드밀 감독에게 정식으로 항의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하야카와를 때려 죽이기 위한 단체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 수가 무려 30개에 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