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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9 11:43:22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드 라 모트 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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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경력

1. 개요

프로이센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드 라 모트 푸케(Friedrich Heinrich Karl Baron de la Motte Fouque)의 조부이기도 하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푸케는 1698년 2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그는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 이후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한 위그노 집안의 자제였다. 그는 부모와 함께 첼레로 갔다가 1706년 레오폴트 폰 안할트-데사우의 시종이 되었고, 1715년 대북방전쟁에 참여한 레오폴트와 함께 스트랄순트 포위전을 참관했다. 이후 1715년 11월 26일 안할트-데사우 보병대의 소위가 된 그는 1719년 3월 8일 2등 준위가 되었고, 10월 1일에는 1등 준위가 되었다. 1723년 1월 25일, 푸케는 2등 대위가 되었고, 1729년 2월 21일에 1등 대위로 승진하여 한 부대를 지휘했다. 1733년 5월 8일 할레에서 엘리자베트 마그달렌과 결혼했다.

푸케는 프로이센의 황태자(훗날 프리드리히 대왕)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황태자가 라인스베르크에서 원탁의 기사단을 결성했을 때 거기에 가담했다. 1739년 1월 22일, 푸케는 10년째 대위에 머물러 있는 처지에 불만을 품고 프로이센군을 떠나 덴마크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7월 12일에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다가 1740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대를 받고 프로이센으로 돌아갔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발발 전날인 1740년 7월 23일, 푸케는 프로이센군 대령으로 재입대했다. 그리고 7월 26일에 카마스 화승총 부대의 지휘를 맡았고 11월 11일에 그램조와 뢰크니츠의 선임 행정관이 되었다. 11월 14일, 그는 무공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740년부터1742년까지 다양한 전투에 참가했고 1741년 슈바이드니츠 요새 공략에 성공했다. 1742년, 푸케는 야전군 원수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의 군단에 배속되었고 1743년 5월 13일 글라츠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744년 12월 31일 푸케 화승총부대 지휘관이 되었다. 1745년 1월 16일 소장으로 진급한 푸케는 1746년에 조른도르프 전투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749년 3월 31일부터 글라츠에 성공회 성당 건설을 감독했다. 1751년 1월 22일 중장으로 진급한 푸케는 9월 2일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754년부터 연간 1천 탈러의 재정을 지원받으며 글라츠 요새의 방비를 강화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후, 푸케는 1756년 8월 29일까지 하부 슐레지엔 연대와 함께 프랑켄슈타인에 있었다. 9월 7일 그의 부대는 글룸페나우로 진군했고 9월 11일 글라츠로 진군한 뒤 슈베린 원수의 지휘하에 보헤미아 침공 작전을 수행했다. 그 후 프로이센군은 겨울 숙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슐레지엔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푸케는 오스트리아군을 1756년이 끝나기 전에 슐레지엔에서 모두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11월 8일 밤에 글라츠에서 베르너 중령이 이끄는 200명의 병사들과 로젠 소장이 지휘하는 300명의 후사르 부대를 파견해 11월 9일 새벽 짙은 안개를 틈타 레니네르에 있는 오슽릐아 전초기지를 습격하게 했다. 그들은 임무를 완수해 1명의 중위와 12명의 병력, 31마리의 말을 포획했고,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손실은 부상자 2명이었다.

1757년 봄, 푸케는 보헤미아 침공 작전에 참가했고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서 보병 좌익 1군단의 여단 하나를 지휘했다가 부상당했다. 이후 6월 18일에는 콜린 전투에도 참가했고 12월 5일엔 로이텐 전투에 참가했으며, 브레슬라우 탈환 직후에 군단장으로 임명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지시를 받들어 슈바이드니츠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1758년 4월 프로이센군이 모라비아 침공을 진행했을 때, 푸케는 수송부대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4월 27일 푸케는 수천 대의 마차를 몰고 4개 구역으로 나눈 후 나이세 쪽으로 행진했다. 이후 그는 올로모우츠 요새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급에 만전을 기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연이은 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급기야 돔슈테트 전투에서 한스 요아힘 폰 치텐이 이끄는 3만 수송 부대가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1만 명에게 기습당해 패퇴하고 4천대에 달하는 보급마차 중 불과 250대 만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푸케는 본국으로 철수하는 아군을 엄호했으며,11월 8일에 작센으로 향한 프리드리히 대왕을 대신해 슐레지엔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그는 슐레지엔에 침입해온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25개 보병 대대와 30개 기병 대대로 구성된 군단과 함께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1759년 3월 1일, 푸케는 보병대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후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모라비아로 침입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방비가 강하다는 걸 깨닫고 별 성과 없이 그루브치체로 돌아왔다. 5월 21일 슐레지엔 북부와 루사티아에서 전역이 시작되었을 때, 그의 군단은 카멘츠와 프랑켄슈타인 사이에 주둔했다. 그 후 그는 7월 5일 오스트리아 그렌저 부대 1,300명을 프랑켄슈타인에서 공격해 처음에는 적을 숲속으로 몰아내는 듯 했지만, 그렌저 부대가 군대를 재정비한 뒤 역습을 가해오자 패퇴했다. 이후 그는 슐레지엔에 쳐들어온 오스트리아 분견대에맞서 분전했고, 10월 말까지 란데스후트에 주둔했다. 11월 9일, 그는 코젤로 후퇴했고 11월 30일 라티보르에 진을 쳐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1760년, 푸케는 본부를 란데스후트에 두고 슐레지엔 수비대 1만 3천 명을 통솔했다. 그는 란데스후트 주변의 요새화된 언덕들을 장악했으며, 잘 배치된 탄약고들을 많이 확보했다. 그러나 5월 말, 그는 슈바이드니츠와 브레슬라우가 적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란데스후트의 언덕에서 내려와 근처를 지나고 있던 라우돈 남작의 오스트리아군에 접근했다. 그러면서 그는 프라이베르크 근처에서 전령을 보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6월 4일까지 원군을 받지 못하자 슈비이드니츠 근처의 우르벤으로 물러났고, 6월 6일 브레슬라우를 보호하기 위해 로메나우로 후퇴했다.이에 라우돈 남작은 글라츠를 봉쇄하고 텅 비어 있는 란데스후트를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6월 11일 푸케에게 란데스후트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 16일 대왕의 명령을 접수한 푸케는 란데스후트를 향해 진군했다.

6월 17일 란데스후트 근방 고지대에서 오스트리아 분견대를 몰아낸 그는 한스 요아힘 폰 치텐에게 3개 대대의 증강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군이 오기 전,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은 병사들을 소집해 푸케의 군단을 쳐부수기로 했다. 푸케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후방으로 물려나려 했지만 대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우기로 했다. 이리하여 6월 23일, 푸케는 3만 천여 명의 적병을 상대로 란데스후트 전투를 치렀다. 그는 이 전투에서 분전했으나 끝내 패했고, 푸케는 적 후사르들에게 세번이나 칼로 난자당한 뒤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 기병대에 소속되어 있던 잘츠베르크 남작 칼 보이드 대령이 중상을 입은 푸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그러자 푸케는 대답했다.
내 피로 고운 안장을 더럽힐 수 있으니 거절하겠소.

그러자 보이드 대령이 대답했다.
제 안장은 영웅의 피로 물들여야 얻을수 있습니다.

훗날 프리드리히 대왕은 푸케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행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푸케는 마치 로마인처럼 행동했다.

푸케는 포로가 된 후 오스트리아 당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는 당국에 자신의 포로 생활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며 수많은 탄원서를 쏟아부었고, 이 때문에 포로 담당관들은 그의 불만에 일일이 답하느라 몇 주의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또한 푸케는 오스트리아 측이 연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에도 불만을 쏟아부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포로가 된 프로이센 장교들에게 연금을 지불했지만 프로이센에 억류되어 있는 오스트리아 장교들이 연금을 받지 못하거나 가치가 낮은 화폐로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해 3개월 동안 지불을 중단했다. 이후 그들은 프로이센 장교들에게 오스트리아 듀카트의 약 50% 정도의 가치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했다. 푸케는 이를 받아들이기 를 거부하고 스스로 포로 신세가 된 프로이센 장교들의 지도자가 되어 당국에 격렬한 어조의 편지를 쏟아부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 골칫거리 포로를 해결하기 위해 푸케를 카를슈타트 감옥으로 이송시켰다. 이후 다른 장교들은 석방되었지만, 푸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7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있었다.

2.4. 이후의 경력

7년 전쟁이 끝난 후 프로이센으로 돌아온 푸케는 글라츠 요새의 지휘관으로 복직되었지만 곧 현역에서 은퇴하여 브란덴부르크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는 종종 산수시 궁전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만나 담화를 나누며 여유로운 생활을 보내다가 1774년 5월 3일 브란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향년 7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