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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7 15:37:03

한성호 침몰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세월호 참사와의 비슷한 점3. 음모론

1. 개요

1973년 1월 25일에 발생한 선박 침몰 사고로 19명이 사망했고, 42명이 실종되었다.

사고 당일 목포에 있던 한성호는 아직 폭풍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전9시에 정원 86명을 초과한 136명의 승객을 태우고 진도로 출발했다. 중간의 다른 섬을 거쳐 조도로 향하던 중 거센 파도로 바닷물이 뱃속으로 들어와 엔진의 시동을 끄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센 파도가 지속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14시 30분경 침몰하였다. 사고 당시 탑승객은 109명이었으며, 그 중 48명이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19명, 실종자는 42명으로 집계되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관매초등학교[1] 학생들을 비롯한 조도면 주민들이었다.

2. 세월호 참사와의 비슷한 점

이 사건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비슷한 점이 많다.

안전의 중요성을 망각하면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3. 음모론

세월호 참사와의 유사점과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언론에서 한성호 침몰 사고로 가족을 잃었거나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에게 인터뷰를 했고, 이를 통해 참사는 되풀이될 수 있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 그러나 음모론자들은 이를 확대해석해 한성호가 박정희 대통령의 부정선거를 사회적 이슈로 덮으려는 시도로 규정하고, 이를 기획한 인물로 당시에 박정희의 총애를 받었고, 세월호 사고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을 지목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이슈를 덮으려는 시도라고 하기엔 언론의 보도가 거의 없었다. 네이버 아카이브에서 1973년 전체를 검색해도 한성호 기사는 3개 언론사에서 총 20건밖에 나오지 않는다. 매일경제가 8건, 당시 반박정희 보도가 가장 많았던 동아일보가 7건이고, 친정부 신문인 경향신문이 5건으로 가장 적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집에 TV도 없었으므로, 신문이나 라디오가 소식을 접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1] 당시 국민학교, 2012년 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