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泳
1908 ~ 1952
1. 개요
조선 출신의 영화 감독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영화 활동을 하였다.2. 생애
1908년에 태어났으며, 묘비에 따르면 출신지는 만주다. 17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히나츠 에이타로(日夏英太郞)' 라는 가명을 이용해 일본인 행세를 하며 일본 영화계에서 활동하였다. 일본에 있던 사람들도 그가 조선인인 줄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활동했으며,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 자식도 두었다. 하지만 1937년에 영화 촬영에 사용할 폭약의 양을 잘못 계산하여 촬영 장소를 훼손한 사고를 낸 뒤 경찰 조사 끝에 조선인임이 드러나 조선으로 추방되었다.허영은 조선에 추방된 이후에도 영화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1941년에는 내선일체를 홍보하는 내용의 영화 <그대와 나(君と僕)>를 제작하였으며,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와 유명 여배우 문예봉이 출연하였다.
이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허영은 군속자격으로 동남아에 파견된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선전 영화를 찍었다. 당시 허영이 찍은 영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는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연합군 병사들이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선전하는 영화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전후 전범 재판에서 일본군의 포로 학대와 관련된 내용의 증거로 쓰였다.
시간이 흘러 일본의 패전이 가시화되자 허영은 조선이나 일본으로 귀국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정착해 '휴웅(Huyung)'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당시의 자료를 볼때 조국으로 되돌아가야 손가락짓을 받을게 뻔했고, 당시 일본도 미군이 통치했던 시절이니 귀국이나 일본으로 귀화 모두 포기했던 것이었다. 정착 이후 허영은 일본의 철수 이후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 지배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 국민들의 활동을 영상으로 남겨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고, 이 영상으로 만든 영화 <프리다>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영화가 되었다. 이후 허영은 1952년에 42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자카르타 쁘땀부란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3. 기타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히나츠 모에코(日夏もえ子)를 두었으나 일본의 패망 이후 귀국을 단념하며 가정을 버렸다. 모에코 씨는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2000년에야 알았다고 하며, 이후 아버지에 대해 다룬 <월경의 영화감독 히나츠 에이타로>라는 책을 썼다.허영이 일본군을 따라다니던 시절 찍은 영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는 2019년에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에서 처음으로 국내에 상영되었다.
허영 외에도 1942년에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양칠성(1919~1949)이 일본의 패전 이후 귀국을 단념하고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을 지원한 사례가 있다. 일본군 패잔병 문서 참조.
4. 참고 자료
광복영화 전성시대에 되새겨지는 ‘독립군 감독’의 말허영에 대하여 / 이명원
일 제국주의 그늘? 허영·이병우 감독, 친일 단순화하기엔…
연세대학교, 영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 국내 최초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