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
이영근 (1966~1967) | ▶ | 허윤정 (1967~1968) | ▶ | 서윤찬 (1969) |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허윤정 許允正 | Huh Yun Jung | |
출생 | 1936년 9월 30일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 |
사망 | 2022년 8월 7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코치 | |
신체 | 175cm | |
학력 | 목포고등학교 (졸업) 공군사관학교 (학사)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공군 축구단 (1961~1964) 대한석탄공사 축구단 (1964~1967) 양지 축구단 (1967~1968) 싱타오 SC (1969~1970) 서울은행 축구단 (1970~1975) 성무 축구단 (1980) |
코치 | 서울은행 축구단 (1970~1975 / 플레잉 코치) 성무 축구단 (1980~1981) | |
국가대표 | 49경기 21골 (대한민국 / 1963~1971) | |
가족 | 조카 허정무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인. 축구인 집안과 허정무 前 국가대표 감독의 친척으로도 유명하다.[1]1960년대 홍콩 리그에 진출하며 대한민국 축구 선수로는 해외 진출에 처음 성공한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2. 클럽 경력
주로 군인 팀에서 경력을 쌓은 선수다. 1961년 공군에 입대해 공군 축구단에서 3년동안 활약했다. 공군 복무 시기 세계군인축구선수권 대한민국 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하기도 했으며, 1964년 전역 후엔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64 도쿄 올림픽과 1964 AFC 아시안컵 이스라엘 대회 대표로써 메이저대회를 처음 경험했다. 전역 후 대한석탄공사 축구단에 입단해서는 이회택과 함께 투톱을 형성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다.1967년에는 당대 최고 선수들만 긁어모아 창단한 중앙정보부 산하 구단인 양지 축구단의 창단 멤버가 되었고, 이영근에 이어 2대 주장으로 활약했다.
1969년에는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한 프로축구리그였던 홍콩 퍼스트 디비전 소속 싱타오 SC에 전격 입단하며 한국인 최초 해외 진출 선수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비록 한 시즌이었지만 해외축구를 경험한 뒤 그는 다시 1970년 귀국해 서울은행 축구단에서 말년을 보내고 선수생활을 정리했다.
3. 국가대표 경력
그는 1960년대 국가대표의 핵심 선수이자, 최정민의 뒤를 이은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였다. 1963년 데뷔해 메르데카컵에서 대표팀 첫 경기를 소화했고, 1964년엔 AFC 아시안컵과 올림픽 축구를 연이어 경험하는 등, 당시 한국 축구로써는 드물게 세계 무대를 경험한 선수다. 아시안컵 3경기, 올림픽 축구 2경기를 소화했다.특히 1967년 베트남 독립기념배 대회 우승을 할 당시 4경기 연속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펼쳤고, 이게 홍콩 리그 스카우트들에게 포착되며 이후 열린 므르데카컵 종료 이후 싱타오 SC에 입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7년과 1968년은 허윤정의 국가대표 커리어 최전성기로 당시 그는 9경기 출전에 11골이라는 어마무시한 골 감각을 뽐내고 있었다.
싱타오 SC에서 돌아온 이후인 1971년에 다시 국가대표에 뽑히기 시작한 그는 1972 뮌헨 올림픽 축구 예선을 끝으로 대표팀 경력을 마무리했다. A매치 통산 49경기 21골을 기록했다.
4. 지도자 경력
그는 서울은행에서 플레잉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은행권 팀들의 감독직은 대부분 은행 내부 임원들이 맡았기 때문에 그는 사실상 서울은행 팀의 실질적 감독이었다. 이후 군 축구단인 성무 축구단 코치직 등을 두루 거치며 1970년대 후반 전국실업축구연맹전 팀들의 코치직을 역임했다. 심지어 성무 축구단 시절에는 선수가 부족할 시 자신이 직접 교체 투입하여 경기를 소화하기도 했다고(...)하지만 성무 축구단 이후 그는 지도자 생활을 더 하지 않고 축구계 일선에서 물러났다.
5. 여담
- 조카인 허정무를 축구 선수의 길로 들여놓은 장본인이다. 그가 싱타오 SC에 입단한 직후, 그를 환송하기 위한 기념 경기가 국내에 예정되어 있었는데, 경기 장소가 그의 고향인 전남 진도군이었다. 기념 경기 식전 행사로 진도군 어린이 축구 선수들의 오프닝 경기가 있었고, 이 경기에 출전한 당시 목포중 학생 선수 허정무는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이를 눈여겨본 허윤정이 친척 관계기도 했던 허정무의 아버지에게 강력하게 허정무를 축구에 본격적으로 입문시키라고 추천했고 그는 그렇게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축구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 독실한 기독교인로도 유명했다. 1970년대 이영무, 2000년대 이영표보다 앞선 기독교 축구인의 대선배격인 셈이다.
[1] 일부 언론에서는 허정무의 삼촌이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