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허펑산 번체자 何鳳山 | 간체자 何凤山 Ho Feng-Shan | |
출생 | 1901년 9월 10일 |
청나라 후난성 이양시 | |
사망 | 1997년 9월 28일 (향년 96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대만|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외교관, 작가 |
정당 | 국민당 |
명예칭호 | 열방의 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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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그리고 잘못된 때에 있는 올바른 사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 32개의 정부와 50개 이상의 대사관이 구하지 못한[1] 오스트리아의 유대인을 구해낸 의인이기도 했다.난징에 존 라베가 있었고 리투아니아에 스기하라 지우네가 있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허펑산이 있었다.
2. 생애
1901년 호남성에서 태어난 그는 7살때 아버지가 사망했으나 루터교 교회의 도움으로 무난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후 구체적인 경위는 미상이지만 이후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평가되어 예일 대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2] 이후 1926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나[3] 1926년 뭔헨 대학에 입학해 1932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허평샨은 1935년 터키를 시작으로 외교관을 시작하였으며 1937년에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관의 일등서기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안슐루스가 일어나 오스트리아 주재 대사관은 영사관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에 살고있던 20만 유대인들은 목숨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것을 막을 방법은 유럽을 탈출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내륙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성격상 타국을 경유해야만 했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도착하는 당사국으로의 이주를 허가받는 비자를 반드시 소지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인도적인 대우를 해줄 국가가 없는것은 물론이고[4][5] 시간상 여유도 너무 촉박하였다.
그러나 허평샨은 당시 국제적인 조계가 설치된 상하이는 그런 비자가 없어도 되는 전세계의 유일한 예외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상하이를 거치는 임시비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최소한 12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오스트리아를 탈출하여 상하이를 거쳐 홍콩이나 호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에 나치 독일은 영사관에 탄압을 가했으나 이에 허펑산은 근처의 임대아파트에서 비자 발행을 계속하였다. 이후 1940년 5월에 유대인의 출국을 인정하는 모든 비자를 회수당하고 본국으로 귀환당할 때까지 4천명의 유대인을 구해내었는데 여기에 스기하라 지우네의 노력까지 더하여 상하이에는 무려 2~3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고 전했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허펑산은 중화민국의 외교관으로서 제3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소임을 계속했지만 주 콜롬비아 대사로 있던 1973년, 미화 300달러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의혹속에 탄핵당했고 임용중지를 선언당했다. 허펑산 본인은 정치적인 탄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그는 미국으로 이주해 외교관으로서의 40년 인생을 회고하는 회고록을 출판했고 1997년 센프란시스코에서 사망했다.
사후 유엔과 이스라엘에서는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 혹은 이스라엘 명예시민으로 수여되는 등의 영예를 누렸다.
마잉주 대만 총통은 2015년 9월 10일 허펑산의 딸을 총통부에 초청하여 선친의 공로, 인도주의에 경의를 표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는 허평샨 개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례, 복권과 더불어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2차대전 당시 중화민국 정부의 역할과 전쟁 지도의 정통성을 국제사회에 환기시키는 목적을 반영한 것이었다. 본 행사가 중일전쟁 승리 기념일 70주년(9월 3일) 직후에 있었던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1] 대부분 유대인을 구출하는 비자 발급을 거부하였고 오로지 중화민국 공사관만이 이를 발행하였다.[2] 당시 미국에는 의화단 운동의 배상금으로 중국 유학생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것의 일환으로 입학한것으로 추정된다.[3]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중화민국은 당시 친일적인 국제정세에 반발하여 파리강화조약의 조인을 거부했다. 이로 인하여 중화민국은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을 포기했고 이후 독일은 중국의 최대 채권국이 되고 대신 중화민국은 독일에 희소자원을 공급하는 등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4] 1938년 7월 유대인 난민들을 구호하는 목적으로 32개국이 참석한 에비앙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각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5] 다만 도미니카 공화국은 1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