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H.L. Hunley남북 전쟁 당시 남군이 건조한 잠수함.[1] 세계 최초의 육군 소속 잠수함이자 적함에 유효타를 내고 격침시킨 잠수함이며, 사고로 전원이 사망한 최초의 잠수함이라는 오명도 갖고 있다.
초창기의 잠수함이긴 하지만 최초의 잠수함은 아니다. 이미 미국 독립전쟁 당시 터틀(Turtle)이라는 이름의 잠수함이라기에도 민망한 잠수체가 전장에 투입된 바 있고, 미 해군은 헌리보다 몇년 빠른 1861년 앨리게이터라는 이름의 잠수함을 보유해 운용하고 있었다.
함명은 제작자인 남부 육군의 호레이스 로슨 헌리 중위의 이름이다. 그는 제작자인 동시에 시험 운항에도 참여했으나 사고로 자신의 함과 함께 수장되었으며, 자신의 발명품으로 죽은 발명가의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2. 제원
* 전장 : 12.0m
* 전폭 : 1.17m
* 전고 : 1.30m
* 동력 : 인력 프로펠러
* 속력 : 4노트(수상)
* 승조원 : 8명(장교 1명, 사병 7명)
* 무장 : 활대기뢰||
3. 성능
초창기의 잠수함이기 때문에 성능은 정말 조악하다. 당시로서는 수중에서 쓸만한 마땅한 동력이 없었다. 증기기관은 산소 공급과 연기 배출이 걸리고 부피와 무게 면에서도 잠수함에 부적절했다. 그리고 전기 모터는 당시엔 아직 잠수함에 사용할 정도로 개발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인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승조원 7명이 열심히 크랭크를 돌려가며 프로펠러를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밸러스트 탱크와 잠항타를 사용해 잠수와 부상을 하는 등 잠수함의 기본적인 개념은 갖추고 있었다. 같은 시기 북군의 잠수함 앨리게이터는 노를 저어 움직였고 속력도 헌리의 절반 수준이었다. 추후 프로펠러로 교체되었다.
헌리는 전후방 각각 하나씩 작은 전망탑이 있었으며 견시 및 최소한의 파도를 막아주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조금만 크게 파도가 일렁거려도 함내로 대량의 물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심할 경우 침몰의 원인이 되었다.
무장은 활대기뢰(spar torpedo) 하나만을 갖추고 있었는데 함수에 달린 긴 활대 끝의 기뢰를 적함에 박고 후진하면 격발되는 방식이다. 기뢰에는 약 60kg의 폭약이 내장되어 있었으며 일격으로 어지간한 함선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절륜한 위력이었다. 게다가 활대기뢰는 수면에서 살짝 잠수한 다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현대의 어뢰처럼 수선 밑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먹이기에 충분했다. 후술하겠지만 이 폭발력은 헌리의 최후에도 영향을 주었다. 활대기뢰 자체는 헌리 이전에도 있던 물건으로, 주로 작고 재빠른 수상보트에 장착해서 적 함선에 돌격하는 형태였다. 물론 카미카제와 같은 자폭은 아니고 일정 시간을 두고 터지도록 시한장치를 해두는 식이다. 하지만 보트는 발각될 위험이 크고 함선의 포격에 너무 취약하므로 이렇게 잠수함을 이용해서 활대기뢰를 사용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4. 연혁
헌리는 1863년 건조되어 남군의 프랭클린 뷰캐넌 제독의 관리하에 모의전 테스트를 받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사유물이었던 헌리는 도착하자마자 남군에 징발되어 육군 잠수함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이후 당분간 정식 임무도 받지 못하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개발자 헌리와 파트너들은 헌리함에 계속 남아 시험 운항을 이어갔다. 철갑함 CSS 치코라의 장교였던 남부 해군의 존 A. 페인 중위가 정장이 되었고 치코라 및 다른 철갑함의 수병들 또한 헌리에 편입되었다.시험 운항 과정에서 두 차례의 침몰 사고가 있었는데, 첫 사고는 1863년 8월 29일 일어났다. 사고의 원인은 여러 설이 있는데 하나는 수상 항행중 장교의 실수로 해치가 열린 상태에서 잠수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역시 수상 항행중 옆을 지나간 배가 만든 파도가 열린 해치 위로 들어와서 침수되었다는 설이며, 잠수 도중 근처 배의 계류줄이 해치를 건드려 열려버렸다는 설 또한 존재한다. 첫번째와 두번재의 경우 해치를 닫으면 막을수 있지 않나 생각할수도 있지만 헌리는 인력으로 움직이는 매우 협소한 배라 해치를 닫으면 금방 산소가 고갈된다. 원인이야 어쨌건 이 때의 사고로 5명이 사망하고 페인 중위와 승조원 1명은 탈출에 성공해 구조되었다. 이 직후 헌리의 작전권은 완전히 육군에 넘어갔고 정장 역시 육군 장교인 조지 E. 딕슨 중위로 교체되었다.[2] 이후 헌리는 인양되어 수리후 다시 훈련에 투입되었다.
두번째 침몰 사고는 같은 해 10월 15일 발생했다. 수중에서 모의 공격훈련을 하던 헌리는 부력을 회복하지 못해 침몰했고 승조원 8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 때 개발자였던 헌리 본인 역시 사망했고, 최초로 잠수함 승조원 전원이 사망한 사고이자 발명품에 의해 발명가가 사망한 사고로 남게 되었다. 딕슨 중위는 헌리(개발자)에게 훈련 통제권을 넘기고 자리에 없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5.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
그 사이 전황은 남부 연합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개전 초기부터 북군은 아나콘다 계획이라는 전면적인 해상봉쇄작전으로 남부의 보급로를 말려놓고 있었으며, 헌리가 모항으로 삼고 있던 찰스턴 역시 북군의 해군에게 봉쇄되어 곤경을 겪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천대받던 헌리 역시 봉쇄를 뚫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었다.1864년 2월 17일 저녁 헌리는 찰스턴을 출항해 타겟으로 정한 북군의 슬루프함 USS 후사토닉#을 향해 접근했다. 저녁 8시 45분 후사토닉에 성공적으로 접근한 헌리는 활대기뢰를 앞세워 후사토닉의 우현 앞부분에 돌진했다. 헌리의 돌격을 알아차린 후사토닉은 수병이 총격을 가하고 전속력으로 후진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 늦었다. 활대기뢰는 성공적으로 후사토닉의 옆구리를 터뜨렸고, 5분 뒤 배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침몰했다. 이 폭발로 승조원 5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구명정을 통해 퇴함한 뒤 인근의 북군 함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후사토닉은 최초로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한 선박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하술했듯이 정작 인명피해 자체는 헌리보다 더 적었다.
그러나 헌리 역시 딕슨 중위를 포함한 승조원 8명과 함께 실종되었다. 육지에서 공격 성공을 알리는 헌리의 푸른 불빛(해군에서 사용되는 신호등)을 보았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만 끝내 헌리와 승조원들은 돌아오지 못한채 찰스턴의 앞바다에서 모습을 감췄다.
6. 침몰 원인
헌리의 침몰 원인은 근래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헌리의 선체를 찾지 못했고 자료가 부실하다 보니 상당부분 추측에 의존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가장 유력했던 두 가지 가설을 소개한다.- 공격에 성공해 돌아가던 도중 선체의 손상이나 파도로 침몰했다.
이 설은 헌리가 보내는 푸른 신호등을 관측했다는 사료에 기인한다. 후사토닉을 성공적으로 격침시킨 헌리가 귀항하던 중 선체에 받은 데미지 혹은 파도로 인해 침몰했다는 설이다. 이미 수상항주 도중 한번 침몰한 전적이 있는 만큼 이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1999년 제작된 TV영화 The Hunley(국내명 '헌리호의 최후')역시 선체 손상설을 채택했다.
- 공격 직후 충격파로 전원 사망하거나 실신했다.
이 설은 헌리가 보냈다고 여겨지는 신호가 잘못 본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한다. 후사토닉을 격침시킨 60kg 가량의 폭뢰는 충격파를 통해 헌리의 승조원들에게도 치명적인 내상을 주었고, 따라서 폭뢰가 폭발하는 순간 승조원 전원이 즉사했거나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란 설이다.
1995년 헌리의 선체가 발견되고 2000년 인양에 성공하면서 그동안 정체되었던 원인 규명에 가속도가 붙었다. 헌리의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했고 내부에는 승조원의 유골과 물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부에는 푸른 불빛을 내는 램프가 없었고 비상탈출시 떼어내는 무게추 역시 부착된 채로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듀크대학교 연구팀의 연구 결과, 헌리가 사용한 활대기뢰의 폭약은 내부 승조원들을 즉사시키기에 충분한 양이었다고 한다.# 선체와 당시 상황에 대한 연구결과가 나온 현재는 충격파설로 거의 기운 상태다.[3]
양호하게 보존된 유골을 토대로 복원된 승조원의 얼굴.# 발견된 승조원의 유골은 훈련 도중 먼저 사망한 헌리의 선임 승조원들 옆자리에 2004년 4월 17일 안장되었다.
7. 기타
남군은 헌리 외에도 활대기뢰를 장착한 반잠수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살짝 잠수해서 세일과 배기구만 내밀고 항행하다가 활대기뢰를 박아넣는 식인데, 데이비드라는 반잠수정이 이런 방법으로 북군의 철갑함[4] USS 뉴 아이언사이드에 피해를 입히는 전공을 세운 적이 있다. 단, 이쪽은 잠수함보다는 어뢰정이나 반잠수정의 선조격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참고로 이들 반잠수정들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북군 봉쇄함들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나 미미한 성과만을 거두었고, 결국 최후에는 찰스턴이 점령당하면서 과정에서 대부분이 북군에게 노획되어 버렸다.8. 대중매체
1999년 The Hunley라는 TV 영화가 방영했다. 국내에는 2000년에 비디오로 '헌리호의 최후'라는 이름으로 수입되었으며 공격후 귀항하다 선체 데미지로 침몰했다는 설을 따르고 있다. 침수되어가는 선내에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던 승조원들이 먼저 간 가족을 만나는 마지막 부분이 안타까움을 준다. 딕슨 중위 역을 아만드 아산테, 찰스턴 지역사령관인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5] 역을 도널드 서덜랜드, 헌리의 승조원 역을 세바스찬 로체, 크리스 바워, 마이클 스툴바그가 담당하는 등 TV 영화치고는 의외로 캐스팅이 괜찮다.중국 게임 전함소녀에서 심해함선으로 등장한다. 헌리의 가장 큰 특징인 크랭크는 머리 뒤에 붙어있으며 촉수로 돌린다. 1-5 해역에 수크바타르, 오딘, 베스탈과 함께 등장하며 체력과 장갑이 999라 사실상 잡을 수 없다. 대신 화력은 0이다.
[1] 잠수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편의상 광의적 의미의 잠수함으로 표기한다.[2] 정장 자리에서 잘린 존 A. 페인 중위는 남북전쟁 종전까지 살아남아 결혼도 하고 소소하게 살아가다가 1876년 3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심심하면 그의 인생의 흔적을 따라가보자.#[3]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운용했던 작약량 132kg짜리 Mark VII 폭뢰는 22mm 두께의 외피를 가진 잠수함 상대로 약 14m 정도의 피해 반경을 낸다고 평가받았다. 그런데 헌리의 외피는 22mm보다 얇을 것이 뻔하며 사이즈 자체도 매우 작아서 승무원에게 충격이 그대로 전달될 것이며, 가장 중요한 활대의 길이는 선체의 길이와 대조해 볼 때 대충 봐도 8m도 안 되어 보인다.[4] 철갑을 둘렀지만 원본이 목조함이었기에 반철갑함에 가깝다.[5] 남북전쟁의 시발점인 섬터 요새 공략전의 지휘관이었다.